松珉隨筆房

히말라랴 트레킹을 다녀와서(2)

혜안1952 2011. 11. 21. 23:00



 

<MBC에서 SINUWA까지>
   아침에도 식당쪽은 쳐다보기도 싫다. Hot Milk와 계란 후라이 1개로 겨우 아침을 때우고 짐을 다시 꾸렸다.   오늘도 역시 10시전에 Avalanche Track을 통과해야 한다. 내려가는 길은 확실히 더 쉬운 것 같다.그렇지만 가파른 계단이 많아 무릎에는 치명적이다. 폴에 의지하여 조심조심 걷지만 속도는 올라 올 때 보다 배를 내야한다. 도반에서 점심을 먹고 시누와까지 갈려고 하며 어쩔 수 없다. Hinku 동굴을 지나  Himalaya Lodge에서 잃어버린 헤드 렌턴을 찾을 겸 잠시 들렸으나 이틀이 지나서인지 결국은 아쉽게도 찾지 못하고 도반까지 왔다. 그 때 까지도 입맛이 없었으나 다행히도 한 동료가 햇반을 주어서 물에 말아서 먹으니 먹을 만 했다. 어제는 그동안 아껴두었던 라면도 보기 싫어 MBC에서 포터들에게 모두 주었었다. 점심을 먹고 내려오는데 한국인 가족이이 식사를 하며 인사를 했다. 전 북경지점장이셨던 조화수 선배님의 친구 분이시란다. 부인과 따님을 데리고 가족트레킹을 오셨다고 했다. 용기가 대단히 부러웠다. 또 머리가 하얀 60-70대 일본 노인들이 단체로 노익장을 과시하며 트레킹을 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건너편 계곡에는 햇빛이 쨍쨍한데 우리 쪽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울창한 열대 우림 지역이라 나무가 우산이 되어 옷은 적지 않으나 걱정이 되었다.
   MBC를 출발한지 7시간만에  Sinuwa Guest House에 도착하여 3일만에 온수로 목욕을 했다. 기분이 상쾌하고 좋았다. 전기가 없어 일찍 저녁을 먹는데 비가 다시 쏟아진다. 일찍 잠자리에 들어도 잠이 오지 않는다. 올라 갈 때처럼 긴장감이 없다. 옆방에 가보니 역시 잠이 오지 않는 동료 몇 명이 동양화를 하고 있다. 나도 슬쩍 끼었다. 밖은 아직 빗방울소리가 들렸다. 한참후 문이 열리더니 포터 한 명이 술이 취해서 왔다. 포터들도 긴장이 풀렸는 모양이다. 내일을 생각해 가서 자라고 했더니 흙으로된 방바닥에 넘어져 그냥 잔다. 자기들끼리 술 한잔씩 했나보다. 이해가 갔으나 다시 혼을 내서 자기들 방에 가서 자도록 쫓아냈다.  그러나 화장실에 가기 위해 밖을 나오니 방문 앞 흙바닥에 쓰러져 자고 있었다. 비는 그쳤어도 바깥 날씨가 꽤 춥다.  그냥 두면 얼어죽을 것 같아 다른 포터들을 깨워서 데리고 가도록 했다. 우리도 어느 듯 촛불이 다되어 가서 잘려고 하는데 누군가 가스등을 빌려왔다. 하루저녁에 사용료가 20불이란다. 불 값치고는 엄청나게 비싸다.
<시누와에서 란드룩까지>


노천온천
    산에서 6일째.TV 와 신문을 안보니 날짜개념이 없다. 오늘은 Hot Spring에서 노천온천을 하고 Jinu Danda에서 점심을 한후 란드룩까지 가야 한다. 어제밤에 높은 산에는 비 대신 눈이 왔는지 가까운 고봉들도 설산으로 변해있다. 7시10분에 촘롱을 향해 출발했다. 올 때와 반대로  촘롱은 냇가까지 내리막을 걷다가 수많은 돌계단을 다시 올라가야 했다. 돌층계가 셀 수도 없을 만큼 끝없이 이어졌다. 촘롱은 그래도 ABC Tracking Course 에서는 제일 큰 마을로 다른 마을은 여기서 물건을 사다가 판다고 한다. 어떤 상점은 Wholesale Store라고 쓰여져 있다. 학교도 있다. 교문 앞에서 아동들과 선생님 한 분과 같이 사진을 찍고 보내주겠다고 하니 따라오란다. 벽돌로 지어진 엉성한 건물로 갔다. 내심 겁이 났다. 소위 교무실에는 나무로 된 탁자와 새카맣게 그을린 주전자와 석유버너가 있었다. 차를 대접하겠다고 하여 시간이 없으니 이메일 주소나 적어달라고 하니 종이가 없다. 할 수없이 내 배낭 수화물 Tag에 겨우 적어왔다. 선생님 이름은 Mom Nath로 영어 외에 서너 과목을 더 가르치고 교사 8명이 초. 중학생 160명을 가르치며, 수업은 오전 10시에 시작되어 학년에 따라 12시에서 오후4시까지 한다고 한다. 마을에는 약100여 가구에 인구가 4-5 백명쯤 될 거란다.  올라올 때 묵었던 Excellent View Point Lodge를 지나 촘롱 마을을 벗어나니 지누로 가는 길과 간드룩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으로 들어서니 저 아래 지누가 멀리서 보이는데 계단이 너무 가파르고 어떤 곳은 경사가 70도가 넘는 곳도 있다. ABC 트레킹에 있어 침낭, 양폴, 물은 필수라고 생각된다. 롯지 외에는 물을 먹을 수 있는 곳이 한군데도 없다. 지누는 촘롱에서 약 400m를 내려 가야하니  가파를 수밖에 없다. 맞은편 계곡 건너에는 집도 몇 채 안 되는데 계단식 농지가 수 백개는 될 것 같다.  지금은 추수가 끝나고 비어있어 누가 무슨 농사를 짓는지 궁금했다. 기진맥진 간신히 지누 가까이 오니 hot spring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왔다. 어떤 동료들은 지친 몸에 온천 해봤자 또 땀에 젖는다면서 식당으로 바로 갔다. 그러나 여까지 와서 노천온천을 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될 것 같아서 내려가니 온천은 의외로 멀리 있었다. 우거진 열대 우림을 지나 냇가에 다다르니 물가 바로 옆에 돌과 시멘트로 만든 탕이 3개 있었다. 물은 아주 뜨겁지 않지만 계곡 물가에 이런 온천이 있다니 정말 신기했다. 온천 주변에는 야생 원숭이들이 떼를 지어 살고 있다. 한 10분 정도 온천을 끝내고 식당으로 오니 다시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고 다리만 아파 괜히 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입안도 헐기 시작했다. 지누 식당은 노천온천을 개발한 주인이 운영하여 온천욕탕 비용은 무료로 했다. 식당에는 서양인들도 꽤 많이 있었다. 아직까지 입맛이 없어 할 수 없이 매점에 가서 사과1개(30루피)와 환타 1병(40루피)을 사서 감자와 같이 먹었다.  마당 좌판에서 $10 하는 목각 코끼리 인형을 $3에 샀다. 지누는 언덕 중간에 있어 New Bridge 까지는 4-500m를 더 내려가야 했다. 거기까지 약 2시간정도 걸린 것 같다. 여기서부터는 계곡을 왼쪽으로 끼고 걷는다. 한쪽은 천길 낭떨어지 이고 중간중간에 갈림길이 있어 헷갈린다. 먼저간 샤카가 길바닥에 화살표시를 해두었다. 라마가 길잃은 인원을 체크하기 위해 산길을 마치 평지처럼 뛰어다닌다. 중간중간 바나나나무에 바나나가 달려있어도 따먹을 힘이 없다. 거꾸로 이 길을 올라오는 사람들도 더러 있지만 너무 힘들어 보였다. New Bridge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200m 더 높이에 있는 Landruk 까지 2시간을 걸었다. 마을입구에 들어서니 마오이스트들이 그들의 주장을 담은 구호를 적어 여기저기 붙여놨다.
  1)Let's Establish 'Republican Nepal'
  2)Desolve-so called Royal Army
  3)No Foreign Army involvement,it is our Nationalistic & Democratic War
                                                - CPN(MAOIST)
하필이면 숙소로 정한 롯지가  마을의 가장 윗쪽에 있어 한발자국도 움직이기 어려운 상황에서 다소 원망스러웠다. 마을 중간에는 망루 비슷한 5층집도 있었다. 우리가 워낙 인원이 많다보니 롯지를 2개나 빌렸다.    나는 아래쪽에 있는 New Hotel
Sherpa 의 아담한 2층 가운데 방을 배정 받았다. 바로 앞쪽 건너편에는 트레킹 첫날밤을 잤던 간더룩 마을이 보였다. 두 마을은 계곡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며 주로 Gurung족들이 살고 있다. 우리는 오늘이 산에서 마지막 밤이므로 배낭 속 먹을 것은 전부 꺼내서 식당으로 모였다. 식당 반찬에다 우리 반찬을 모두 차리니 식탁이 가득 찼다. 모처럼 트레킹 팀장님 덕택으로 맥주도 한 잔 했다. 식사후 우리들은 자기 포터에게 한명 한명씩 별도로 수고비를 주고 Best Porter도 뽑아 시상을 했다. 또 샤카와 라마에게도 팁을 주었다. 잠시후 포터들이 고마움의 표시로 이벤트를 하겠다고 했다. 그들은 별도로 주문을 했는지 Cake를 가지고 와서 라마가 영어로 성공적인 트레킹에 대한 감사와 축하인사를 하고 춤과 노래로 우리를 즐겁게 했다.  축제에 술이 빠질 수 없다며 이정식상무께서 비싼 맥주를 왕짱 사셨다. 맥주는 덴마크 코펜하겐과 제휴하여 만들었다는데 우리나라 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맛이 좋았다. 포터들은 대부분 체격이 왜소하고 신발도 고무로된 슬리퍼를 신었는데 그험한 산길을 그것도 50kg나되는 배낭을 이마에 이고 일주일씩이나 다니고도 저렇게 춤추고 노는 것을 보면  살기위한 정신력과 낙천적인 그들의 민족성 때문인 것 같았다. 이동네서도 마을발전기금 모금을 위해 동네 아낙네들이 민속공연을 하겠단다. 롯지 주인에게 모닥불을 피워달라고 하였더니 없다고 한다. K 형이 눈치 빠르게 5불을 얼른 찔러준다. 없다는 장작은 밤새도록 꺼질 줄 몰랐다. 동네 사람들이 촌장님을 앞세우고 롯지로 들어섰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이국적인 사람이 많고 너무 예쁘다.  이상무께서 인물사진 찍느라고 사탕을 있는데로 다 준다. 춤과 노래가 시작되고 우리 일행도 마지막 밤이 아쉬운 듯 같이 어울려 논다. 그런데 노래방 체질이라 가사를 제대로 아는게 없어 노래가 이어지지 않는다. 할 수 없이 촘롱에서 포터들에게 배운 ‘얼 삼 삘리리’만 반복했다. 춤판은 곧 마을의 축제가 되어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와서 같이 즐기는 것 같다.우리들은 공연값과 금잔화 목걸이 값으로 각자 성의대로 기부를 하고 한바탕 춤판은 막을 내렸다. 다시 산장은 밤이 깊어지고 모닥불도 꺼질 무렵 마지막 밤이 아쉬운 듯 동료들이 모닥불 주위로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땅에는 모닥불 멀리 건너 마을 간드룩에는 전기불이 반짝이고 하늘에는 별들이 더욱 초롱초롱 빛나는 가운데 마지막 밤이 깊어 갔다.

란드룩의 순달이들은 종자가 좀 달랐지요. 너무 이뻤다.



LANDRUG 에서 포터들과 마지막춤을....
오늘은 트레킹 마지막날. 란두룩을 출발하여 톨카에 올라 후미대열의 포터들과 같이 포즈를 취했다. 한 포터 뒤를 따라 계단을 오르는데 무척이나 힘들어 보였다. 마지막날의 걸음에서 그들은 어떤생각을 하였고 또  우리들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란드룩에서 포카라까지>
     트레킹 마지막 7일째  6시 기상,  7시 출발. 날씨는 더없이 좋음.
오늘은 Deurali 까지 600m를 올라가서 Pothana에서 점심을 먹고 버스가 대기하는 Phedi까지는 다시 1,000m를 내려가야 한다. 길고 험난한 코스지만 하산길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가볍다. 더군다나 트레킹을 시작하기 위해 무거운 배낭을 지고 이제 막 올라오는 사람들을 보니 괜시리 안스럽다. Talka를 지나 Deurali 까지 오니 동네입구에  지나가는 트레커를 대상으로 마을기금 모금함을 설치를 해 두었다. 집들이 양철지붕인 것을 보니 도시가 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Deurali는 높은 언덕에 위치하고 있어 전망이 아주 좋고 설산 연봉들도 잘 보여서 포터들과 멀리 사우스 안나푸르나를 배경으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간식으로 환타와 사과가 최고 인기다. 사과라야 키위만 한데 맛이 괜찮다. 이제 어려운 고비는 다 지나고 내려가는 길만 있으니 훨씬 마음도 가볍다. 어느듯 포타나에 오니 외국인도 많고 롯지마당에는 의자가 많이 있어 휴식 겸 식사하기가 좋다. 날씨가 맑으니 전망이 아주 좋다. 가끔 구름이 가리기는 하지만 마차푸추레가 아주 잘 보인다. 점심때 삶은 감자가 아주 맛이 좋았다. Deurali에서 Dhampus까지는 길이 완만하고 어떤 곳은 잔디같은 풀이 마치 골프장 Par 3홀은 될 정도로 퍼져있다. 북한산 비봉능선처럼 주로 왼쪽이 확터여서 경치가 아주 좋다. 담파스 근처에는 그 높은 산에 연못을 파놓고 일광욕을 위한 안락의자도 갖춘 고급산장도 있었다. 아마 벌거벗고 누워있기 좋아하는 유럽사람들이 주로 묵는 숙소인지도 모르겠다. 담파스는 마을도 꽤 크고 학교에서 아이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다. 거기서도 학교기금을 모금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고 짓다만 건물도 보인다. 담파스에서 페디로 가는 길은 정반대로 남쪽으로 가는데 처음부터 돌계단이 시작되어 500m를 다 내려 올 때까지 급경사가 계속되어 오르막 보다도 더 힘들었다. 내려가는 도중에 멋쟁이 모자를 쓴 중학교 선생님을 만났다. 자기집은 Phedi에 있고 일이 있어서 집에 들렸다가 포카라에 가야 한다고 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수상이 김x순 아니냐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사람이 없어 다시 물어보니 북한 수상을 말한 것이었다. 그들은 북한과 남한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그래서 마오이스트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매우 위험한 인물들이라고 답하여 북한도 마찬가지라고 알려 주었더니 그제서야 이해한다는 표정이다.
내려가면서 짧은 영어지만 가족이야기며 여러가지 대화를 하면서 같이 걸었더니 덜 지루하였다. 나중에 집에 들러 가방을 메고 와서 자기는 차시간 때문에 빨리가야 한다며 나에게 덜익은 돌배같은 과일을 하나 주고 가서 겁데기를 벗기고 먹으니 맛이 있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도중  아주 오랜만에 우리나라 젊은이를 만났다. 여자2명과 남자1명이 포터도 없이 우리가 내려오는 길을 반대로 올라간다. 아무리 젊지만  너무 무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수천개의 돌계단을 지나 Phedi에 도착하니 벌써 일행의 2/3가 내려와서 일일이 격려의 악수를 하고 라마는 환타를 한잔씩 돌린다. 속세로 돌아온 나는 몸무게가 5kg는 빠진 것 같았다.
<페디에서 다시 포카라로 돌아오다>
   모두가 무사히 트레킹을 마치고 내려왔다. 마지막 돌계단에서 기념사진 촬영을 하고 버스에 올랐다. 오늘 버스는 올 때와는 다르게 인도 TATA자동차에서 만든 최신형으로 이곳에서도 보기가 드물며 오늘 카트만두에서 우리를 싣기 위해 5시간을 달려 왔단다. 버스에 오르자 모두들 극도의 피로로 하나둘씩 잠들기 시작했다. 포카라의 Blue Bird Hotel에 도착 할 때까지 버스 안은 한밤중처럼 조용했다.  모처럼 문명의 세계로 다시 돌아온 느낌이었다. 호텔에서 목욕을 하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갈아 입은후 Phewa 호수가에 있는 교포가 운영하는 천지가든으로 갔다. 이곳 사장님은 전북 군산이 고향이신 분으로 ABC코스 산장마다 식당 광고를 부착하여 우리도 사실은 그 광고를 보고 찿아 갔다. 알고 보니 포카라에 2개 카트만두에 1개의 식당을 운영하는 식당그룹 이었다. 식당은 호수가에 꽤 넓게 자리 잡았고 본관과 여러채의 별채로 되어 있었다.  서쪽은 마침 일몰시간이어서 낙조가 아름답고, 북쪽은 해운대 달맞이 고개처럼  운치가 있었다. 포카라는 도시자체가 뒤로는 설산이 안으로는 푸른 고봉들이 에워싸고 있고 산과 호수가 잘 조화를 이루고 있어 휴양도시 답게 정말 아름다웠다. 야외 파라솔 밑에서 운치있는 호수를 보며 맥주를 한잔하니 피로가 싹 가시는 것 같았다. 다시 대형식당으로 옮겨 삽겹살에 네팔양주를 먹으니 술과 고기가 항상 부족하다. 서울서 한달전에 이곳으로 자원하여 파견 나왔다는 히말라얀 티앤티의 한수빈씨도 음식 나르기에 바쁘다. 그러고 보니 여기와서 산을 일주일이나 다녔는데도 무덤과 돼지를 보지 못했다. 인구의 75%가 힌두인들이라 죽으면 화장을 하고 소고기와 돼지고기는 먹지 않으나 불교도들은 돼지고기는 먹는다고 했다.  나의 인생에서 최고로 기분이 좋은 상태에서 호텔로 돌아와 집에 처음으로 전화를 했다. 룸에서는 국제전화가 안되어 호텔 프론터에서 신청했더니 손목시계로 시간을 잰다. 3분에 12000원이란다.  일부 동료는 밤중에 포카라 시내로 가서 한잔 더 하고 오기도 했다.

 

Phewa Lake 에 있는 한국식당 천지가든에서 일주일마에 맞보는 돼지삼겹살.

고기도 떨어지고 술에 취해 넘어지고 나도 참에 골아 떨어지고... 그러나 잊지 못할 밤이여!!!




<포카라에서 카트만두까지>
    5:30 기상 6:00 식사 6:30 출발
    호텔 옥상에서 마지막으로 희말라야 연봉을 감상하고 사진을 찍었다. 오늘은 버스로 카트만두까지 이동해야한다. 올때는 비행기로 50분 걸렸는데 갈 때는 버스로 5시간정도 걸린단다. 아무리 차가 좋아도 시속 60km이상 달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길이 좋지 않단다. 아침 일찍 길을 나서니 가을 안개가 거리에 자욱하다. 시외버스 터미널은 폐차장처럼 버스가 빽빽히 서있었고 재래시장에는 아침시장이 서는지 인파가 넘쳤다. 수도로 가는 국도는 왕복 2차선으로 중간 중간에 대우, 삼성,LG TV 광고판이 보였다. 동네마다 같은 종족들이 모여서 살며 카스트제도 때문인지 외관상으로는 평화롭게 보였다. 그러나 다리나 큰 마을을 지날 때는 군데군데 검문을 하고 있다. 검문소를 통과할 때 우리같은 외국인은 그냥 통과하고 네팔인들은  내려서 걸어 가야한다. 도로 옆으로 흐르는 강에는 래프팅을 하기도 하나 지난 여름 수해로 도로가 여기저기 유실하기도 하고 피해가 많아 보였다. 길은 마치 속초에서 한계령을 넘어 서울로 오는 길 같았다.  너무 지루하여 한참을 자고 일어나니 카트만두 외곽까지 왔는지 또 검문을 한다. 포카라에서 카트만두 까지 오는데 8-9번의 검문을 통과하여 예정된 시간보다 훨씬 늦은 7시간만에 도착했다. Kathmandu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 쌓인 표고 1400m의 분지 도시로 시내 중심가로 들어서니 소음소리에 정신이 어지럽다. 카트만두를 카메라에 다 담을 수는 있어도 녹음기에는 다 담을 수 없다고 하더니 그 말이 실감이 간다. KBC이정식 상무께서 20년 전에 왔을때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단다.  거리의 매케한 연기, 우중충한 건물, 초라한 옷차림, 거무티티한 얼굴은 도시 전체를 어둡게 하고 있다. 그래도 거리에 다니는 사람들 대부분은 이마에 새빨간 곤지를 찍고 있다. 그것은 오늘 하루 무사를 빌며 아침에 집에서 기도를 드리고 어머니나 아내가 붙여준 일종의 부적 같은 것이란다.  네팔 남자들은 야위고 구리같은 얼굴 색갈로 볼품이 없으나 여자들은 대개가 미인이다. 시내에는 은행간판도 가끔 보이고 24시간 ATM기도 있지만 장사가 안돼 문을 닫는 지점도 있단다.  우리 일행은 왕궁앞에 있는 한국음식점에서 점심을 먹고  이곳 최대의 번화가인 Durbar광장을 찾았다. 고대 카트만두의 중심지역이었던 이곳은 대개가 12C~18C에 지어진 목조건물로 수많은 상점과 과 유적들이 혼재 되어 있고, 20C초까지만 해도 왕이 살던 네팔의 살아있는 박물관이다. 원숭이 신인 하누만 상이 여러 가지 색깔의 페인트와 금잔화 꽃으로 어지럽게 장식되어 있었고, 어떤 시바사원은 추녀밑에 보기에도 민망한 적나라한 성애장면을 부조하여 놓았다. 건물이나 조각품을 보노라니 목조가공 기술이 뛰어나고 더군다나 우리나라와는 달리 외세의 침입이 한번도 없어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지만 경제사정으로 관리가 부실한 것이 안타까웠다. 더군다나 사원 주위는 장사꾼들이 건물 안팎을 점령하고 있어 유서깊은 사원들이 방치되는 듯하여 먼 훗날 후세인들이 이귀한 유물을 볼 수 있을지 염려되었다.
   광장근처에는 살아있는 여신이 있는 Kumari Ghar로 갔더니 □자 구조로된 목조 이층건물이 사람이 많아서인지 좀 답답해 보였다.  정면의 2층 창문에 빨간 천이 아래로 내려져 있느데 쿠마리(살아있는 여신)가 가끔 관광객들을 위해서 얼굴을 5초정도 내 보인단다. 관광객들은 언제 쿠마리가 나타날지 몰라 2층 창문만 쳐다보고 있는데 샤카가 오더니만 3개월 전부터 쿠마리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물론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아쉽지만 건물내에 있는 선물가게에서 파는 사진으로 쿠마리 보는 것을 대신했다. 쿠마리는 네와르족 중에서 집안이 좋고 건강하고 용모가 뛰어난 6~8세의 여자아이를 승려, 브라만, 점성가등으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뽑아 여신으로 모신다고 한다. 쿠마리는 일년 중 축제때 한번만 외출이 허용되고 첫 번째 생리가 시작되면 그 집에서 나와 학교도가고 결혼도 하지만 사회적응을 하지 못하고 불행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쇼핑가인 다멜 상가로 갔다. 남대문시장처럼 갖가지 상점이 즐비하다. 네팔의 가장 유명한 토산품인 Pashmina(산양 속털로 만든 모피제품)는 포카라에서 샀기 때문에 우리집 꼬마녀녁의 T-Shirts와 안나푸르나 연봉들이 있는 사진을 하나 샀다. 쇼핑을 끝내고 하이야트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호텔은 공항 가는 길목의 약간 외곽에 있었고, 높지는 않지만 넓은 대지 위에 웅장하고 고급스러웠다. 마지막 저녁식사는 이곳 민속식당인 Bhanchha Ghar에서 하기로 했다. 1층 식당에서 인도식의 저녁식사를 하고 이층으로 올라가니 무희들이 나와서 춤을 추며 간장 종지 만한 접시에 술을 한잔씩 준다. 술은 안동소주처럼 맑고 독했다. 옆자리에는 이곳 부유층인 듯 한 젊은이들이 여자친구와 같이 고급안주와 술을 즐기고 있었다. 빈부의 격차를 실감할 수 있다. 무희들은 예뻤고 춤도 잘 추었지만 친근미나 성의는 없이 그저 상업적인 공연이었다.

구름이 꽉끼고 삼엄한 검문속에 포칼에서 카트만두가는길에 생리적인 고민은 해결해야겠기에...그와중에 옥수수 파는 아주머니 며칠 쉬어도 될정도로 매출을 올렸을거야. 

히피들은 모델료를 요구했다.

 
<카트만두를 떠나가전>
호텔에서 마지막 아침을 먹고 우리 일행은 오전동안 몇 군데를 더 관광하기로 했다.  우리 일행은 우선 영화“리틀 부다”로 유명한 보다나트사원(Bouddhanath Stupa)으로 갔다. 전체인구의 약15%내외가 불교신자고 그 대부분이 티베트인으로 이 사원 근처의 상점과 사람은 모두 티베트풍 이었다.  사원 안에는 달라이 라마의 사진이  크게 걸려있었다.  세계의 문화유산이자 네팔 최대의 불탑인 Stupa는 반지구위 모양 위에 사각형으로 된 사면이 있고 제3의 눈이라고 하는 커다란 눈이 사방을 내려다보고 있다. 네팔리들은 아침 일찍 장사를 나가기 전에 여기 와서 Stupa의 외벽을 돌며 마니차를 들고 옴마니반메홈을 외며 기도를 드리고 간단다.  이 사원은 언제 누구에 의해 세워졌는지 아직도 모른단다. 다만 Jyajima라는 소녀가 4명의 남자에서 각각 아들을 얻어 네 아들의 도움으로 이 성서러운 토지를 구입해 왕의 허락을 얻어 이 사원을 건축하다 죽고 그의 네 아들들에 의해 이 사원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Stupa는 3층으로 되어있고 1934년 네팔 대지진 때도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이곳은 티베트 불교도에 더 인기가 있으며 특히 매년 신년에 축제가 열리고 매12년마다 큰 축제가 열리는데 이는 사원이 12년만에 세워졌다고 믿기 때문이란다. UNESCO는 1979년 카이로에서 이 사원을 카트만두의 다른 6개 유물과 함께 세계 문화유산 보호대상으로 지정하였다.
   마지막으로 우라가 들린 곳은 힌두교 성지이자 세계 3대 힌두 사원중 하나인 파슈파티나트 사원이었다. 사원보다는 화장터로 더 유명한 곳으로 가운데 흐르는강이 바그마티강 이라고 한다. 강이라기보다는 건기라서 그런지 물이 겨우 발목정도 밖에 안 오는 메마른 개천이었다. 입구에 들어서면 강을 따라 좌측에 하얀 죽음의 집(노인들이 임종을 기다리는 곳)이 있고 그 위쪽에 화장터인 시멘트 가트가 있다. 어떤 곳은 이미 장작불이 사그라들기도 하고 막 도착한 시신이 황포에 쌓여 강물에 비스듬히 내려져 있기도하다. 사원앞 다리를 중심으로 강 아래는 서민들의 화장터고 위쪽은 가트가 두 개뿐인 귀족들의 화장터라고 한다. 화장은 대개 오전에 하며 거의 매일 화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다리 윗쪽에서 막 화장준비를 하는데 문상객들이 많은 것을 보니 역시 귀족 출신인 모양이다.   시신을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상주인 두 아들이 웃통을 벗고 아래쪽만 힌 상복을 입고 고인이 된 아버지 발을 붙잡고 차례로 하직인사를 한다. 불은 목덜미 밑에서 시작하여 장작더미 전체로 활활 타오른다. 아마 서너 시간은 걸린다고 한다. 화장터 바로 옆에서는 어린아이와 아낙네들이 강에서 손발을 씻으며 떠들고, 사원 위에서는 신도들이 화장하는 모습을 내려다보고, 다리 건너서는 이 신기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관광객들이 바쁘다.
인도의 바라바시시에 있는 갠지스강 화장터에서 죽음을 맞기 위해 전국에서 임종을 앞둔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과 같이 저 밑의 죽음의 집도 여기 사람들은 무크티바반(구원의 집)이라고 부른단다. 화장된 시신은 한줌의 재가 되어 바그마티강에 뿌려지면 언젠가는 갠지스강을 거쳐 인도양으로 가서 다시 비가 되어 대지로 환생한다는 윤회설을 믿기에 사랑하는 가족을 기꺼이 떠나보낸다고 한다.
  화장터 맞은편 돌층계를 올라가니 남녀성기를 조형화한 이상한 전각들이 죽 서있다. 그 위에서는 마리화나를 피우며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기이한 모습을 한 두 사람이 하도 신기해 사진을 찍을려고 하니 아예 포즈를 취한다. 그리고는 모델료를 요구한다. 카트만두가 히피들의 천국이라고 하더니만 여기를 두고 말했나보다. 하기야 저 건너 화장터를 매일 보노라면 그렇게 살고 싶은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아등바등 하며 살기보다는 하고 싶은 데로 살다가 다음세상에서 새가되어 훨훨 날아다니면 될 것을....이곳 역시 유물들의 손괴가 심한데 외국인들한테만 입장료를 받는다고 한다. 윗쪽에서는 어떤 농부가 벼를 뿌리며 내년에 풍년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내려오면서 보이는 파슈피트나트사원 본당은 시바신을 모신 사원으로 모태신앙이 힌두인들만 들어 갈 수 있단다.  사원을 떠나며 강건너 화장터와 죽음의 집을 우두커니 서서 쳐다보니 인생이란 그저 한 마리 불나방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렀다.
  열 이틀간의 여정을 끝내고 공항정문에 들어서니 내국인은 못 들어간다고 했다. 상황이 올 때보다 더욱 나빠진 것 같다. 그동안 정들었던 샤카와 라마를 떠나보내려 하니 그들도 울먹이고 우리도 정말 아쉬웠다. 입국 장에서 비행기 탑승대기실까지 가는데 여러 번 검색을 받아야 했다. 좁은 대기실에서 지루한 기다림 속에 서울서 같은 비행기를 타고 왔던 불교성지 순례단을 거기서 반갑게 다시 만났다. 대기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꽉 차니 탑승이 시작되고 비행기 바로 밑에서 남녀로 나뉘어 다시 몸수색을 당하고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드디어 비행기가 이륙을 하니 마치 어두운 긴 터널을 빠져 나온 것처럼 답답했던 가슴이 시원해지고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안나푸르나 설산의 연봉들과 산간마을에서 나마스테와 스위트를 연발하던 코흘리게 아이들 그리고 가이드이자 동생 같았던 샤카와 라마의 모습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오렌지 천으로 갈아입고 강가에 기대어 있는 저사람은 인생을 어떻게 살았는지.....

이곳은 천민들이 이승에서 마지막을 의식을 치러는곳이다.


 

인생은 연기와 함께 한줌 재로 변하고,그러나 내세를 믿기에 그들은 슬퍼지 않는답니다.

인도의 바라나시 갠지스강 가트의 화장터와 마찬가지로 시신을 태우는 네팔의 힌두교 최고의 화장터. 이곳은 그래도 귀족들의 화장터고 인쪽 다리 아래는 천민들의 화장터이다.


여기강물은 이곳의 시신을 태운 재를 싣고 긴여핸을 한뒤 인도 갠지스강을 거쳐 인도양으로 흐른다.  바다에서 다시 비에 엉겨 다시 대지로 내린다. 윤회를 믿는 이들의 화장모습은 일년365일 계속된다.  인도에서는 화장터에서 불씨 장사가 가업으로 대를 이어 올정도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단다. 이상무님이 불이 어디서부터 붙이나 잘 보라고 해서 보았더니 죽은 사람의 입이었다.

네팔 힌두교 최고 성지인 파슈파티나트는 시바신을 위해 세워진 힌두사원으로 서기477년에 처음 세워졌으나 10세기경에 파괴되어 지금의 건물은 말라 왕조때 다시 지어져 지금은 모태신앙이 힌두인만이 들어 갈 수 있다.


여행일기를 마치며...

 

    여행일기를 여러 번 쓰려고 시도하다가 엄두가 나지 않고 한번도 이런 글을 쓴 일이 없어 많이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저 나름대로 용기를 내어 기록으로 남기게된 첫 번째 이유는 제가 트레킹을 떠나기 전 여러 가지 자료를 찾아 읽어보았지만 실감이 나지 않아 실제 겪은 일을 기록으로 남겨 저처럼 처음 티레킹을 시도하는 분 들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고, 두 번째는 우리 트레킹팀이 한때 동거동락 했던 것을 되돌아보고 그때의 순수한 마음을 오래도록 간직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저 개인적으로 너무나 큰 경험을 하게되어 가슴 벅찼던 순간들을 언변 부족으로 다 표현할 수 없어 친한 지인에게 들려주기 위함입니다.  저의 짧은 상식과 희미한 기억으로 내용이 틀린 부분이나 실제와 다른 것이 있을 수도 있사오니 넓은 아량으로 혜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저나 같이 갔던 우리일행 모두가 일이 바쁘고 살다보면 짜증이 나거나 가슴이 답답할 때 촘롱과 란드룩의 순박한 어린이들과 낙천적으로 사는 네팔리들, 마차푸쳐레와 안나푸르나의 아름다운  설산들, 그리고 바그마트강가의 화장터를 생각하며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나마스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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