松珉隨筆房

고향 생각

혜안1952 2013. 11. 26. 22:20

고향생각

                                                                                                                                                                                    松珉  김수진

 

   얼마 전 아내와 고향을 다녀왔다. 나의 고향은 심심산골이다. 바다를 처음 본 것이 고등학교 때 설악산으로 졸업여행을 가서이고 고향을 벗어나 본 것이 초등학교 5학년 때 버스를 타고 속리산으로 수학여행을 갔을 때이다. 인도네시아 어느 시골마을에 우리나라 코이카 단원들이 갔을 때 12살 소녀가 자기 마을을 벗어나 본적이 없어 시장 구경을 시켜주고 아이스크림과 예쁜 운동화를 사 주었더니 소녀는 부끄럼도 잊고 말문이 트여서 무표정하던 얼굴에 웃음을 짓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모습이 바로 50년 전의 나의 모습과 너무 흡사하게 보였다. 해거름이면 소에게 풀을 먹이러 마을 뒷산에 가서 두릅 같은 열매를 따 먹기도 하고 친구와 돌팔매질 시합을 하곤 했다. 한 번은 6.25 전쟁 때 남아있던 포탄을 발견하고 집어 던지려고 하다가 삼촌에게 혼이 나기도 했다. 그러다가 멀리 초등학교 앞 신작로에 버스가 뽀얀 먼지를 뿌리며 지나가면 신기해서 버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쳐다보곤 하였다. 버스가 왼쪽으로 가면 군청이 있는 상주로 가고 오른쪽으로 가면 서울로 가는 길이라고 누군가 알려주었다. 그래서 항상 오른쪽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서울을 가보는 것이 꿈이었다.

   한 번은 어머니가 무슨 일인지 서울에 가서 며칠이 되도록 오지 않았다. 나는 매일 저녁마다 어머니가 사립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시장 쪽에서 올라오는 언덕에 가서 기다렸다. 그럴 때 마다 우리 할머니는 한 밤만 자면 엄마가 온다며 나를 달래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머리에 한 짐을 지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그 중에 가장 크고 귀중한 물건은 시계였다. 커다란 괘종시계를 안방 벽에 거니 소 불알만한 시계추가 정적을 깨뜨리고 시간마다 숫자만큼 울리는 것이 너무나 신기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때 어머니는 우리들의 교육을 위해 어디로 가야할지를 탐색하러 서울의 친척집에 다녀왔다고 한다. 결국은 우리는 서울로 가지 못하고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대구로 이사를 하였다. 어머니는 정말 큰 결심을 하신 것이다. 그 때 서울로 왔었다면 내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래도 그 때 어머니의 결심이 오늘의 내가 있도록 한 것이라 생각할 때마다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은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내가 자란 시골마을은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옆집에 혼자 사시는 본동 할머니는 아침부터 우리 집에 거의 사시다시피 했고 나보다도 훨씬 나이가 많으면서도 약간 정신지체가 있는 종고 형은 늘 우리 집 주변을 맴돌았다. 겨울이면 손이 얼어터지면서도 딱지치기와 구슬치기를 하다가 어머니에게 많이 혼났다. 옥같이 곱고 아까운 구슬을 가시덤불속으로 던지시는 어머니가 너무나 원망스러워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도랑에서 솔가지에 불을 붙여서 가재를 잡거나 송사리를 잡던 일, 콩서리를 하다가 동네 아저씨에게 들킨 일, 어느 눈이 많이 온 겨울에는 노루가 동네까지 내려와 잡아서 노루탕 파티를 하고, 돼지 잡는 날은 위에 바람을 넣어 논에서 축구를 하던 생각이 아득하다. 딱지 접을 종이가 없어 교회에 다니시는 분의 애기를 봐주고 빳빳한 종이를 얻어 친구들의 딱지를 싹쓸이 하던 생각을 하면 절로 웃음이 난다. 돼지 먹일 잔 밥을 얻기 위해 동네 어귀를 지나다가 언덕위에 커다란 동물을 만나 혼비백산하여 도망을 갔다. 몇 년 동안 저녁에 그 길을 혼자서는 다니지도 못했다. 지금도 그 때 그 동물이 무엇인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요즘은 고향갈 일이 거의 없다. 부모님 다 돌아가시고 일가친척도 거의 안계시니 이제 알아보는 분도 점점 줄어든다. 몇 년 전만해도 고향에 갈 때는 간단한 음료수나 뭐든지 준비를 했는데 이제는 그 것을 받아줄 분도 거의 안 계신다. 내가 나올 때는 직접 지으신 과일이나 채소를 한 아름 안겨주곤 했는데 이제는 미안해서 인사조차 하기도 어렵다.  겨울이면 눈썰매까지 타던 큰 도랑이 이제는 발 하나 겨우 들여 놓기에도 좁다. 내가 수영을 배우던 작은 저수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위에 공원이 조성되고 어머니가 밭에서 일하시는 동안 누나와 소꿉놀이 하던 탁수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어 주변이 공원으로 지정 되었다. 그 시골에도 서울근교의 전원주택처럼 외지인들이 드문드문 양옥집에 잔디마당을 하고 살고 있고 고구마 밭은 사과 포도 같은 과수원으로 바뀌었다. 우리가 매일 길러서 먹던 우물은 태풍 매미때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지금은 지하수를 식수로 대용하고 있다. 다행히 먼지 날리던 신작로는 고속도로가 생겨서 IC에서 5분이면 우리 마을에 도착할 수 있게 되었다. 고향을 방문한 것은 아내와 같이 귀촌을 해 볼까하여 답사차 들렸는데 예전보다 훨씬 편리하고 깨끗해 졌는데도 왜 옛날처럼 정답게 느껴지지 않는지 모르겠다. “고향에 찾아와도 그리든 고향은 아니로고(중략) 산은 옜산이로되 물은 옜물 아이로고”라는 노래가사가 어찌 이리 딱 들어맞는지.

그래도 어리시절을 보낸 내 고향은 나의 정신적인 지주임에는 변함이 없다. 고향생각은 이제 아름다운 옛 추억으로 가슴에 묻어두어야 할 것 같다. 아! 그리운 내 고향. 그 시절로 다시 돌아만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고향이 따로 있겠는가. 방방곡곡 어디나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정붙이고 살면 고향아니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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