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집착
송민 김수진
은행에 있다 보면 많은 고객들을 만나게 된다. 흔히들 은행은 돈이 많은 사람만 거래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은행의 가장 큰 역할은 신용창조 기능이다. 그러다보니 돈이 많은 사람, 적은 돈을 크게 불리기를 원하는 사람, 돈이 없어서 빌리러 오는 사람 정말 다양한 고객이 찾아온다.
많은 고객 중 오래 전 본점 영업부에 근무할 때 거래하시던 할아버지 한분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그 고객님은 2~3억원 정도를 예치하고 계셨는데 은행에 오시면 꼭 나와 VIP센터 책임자만 상대를 하였다. 그런데 그 분은 그 많은 돈을 3백만 원, 5백만 원, 7백만 원의 3종류의 정기예금통장으로 나누고 매월 서로 다른 통장으로 각각 이자를 받았다. 한 달에 한번 씩 은행에 오셔서 이자가 제대로 입금되었는지를 확인 하는 것이 큰 일과였다. 제가 그렇게 하는 사유를 물었더니 본인이 연세가 많으셔서 중간에 날치기를 당하거나 통장을 분실하여도 손실을 줄이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고 하셨다. 그러다보니 그 분은 약 6~70여개의 통장을 관리 하시느라고 불편한 몸을 이끌고 멀리 화곡동에서 한 시간이상을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을지로에 있는 은행 본점까지 온다. 매달 오실 때가 되어도 안 오시면 궁금하고 또 오실 때마다 안색이 안 좋으신 것이 확연하여 집과 가까운 지점을 이용토록 여러 번 안내를 드렸다. 그 분은 지점은 작아서 믿을 수가 없어서 본점으로 오신다고 하셨다. 저는 지점에서 잘못되면 본점에서 다 책임을 지니 지점이 비록 규모가 작지만 본점과 똑 같이 생각하셔도 된다고 열심히 설명을 드렸지만 그 분의 생각은 바뀌지 않으셨다.
어느 날 아침 그분께서 오셨기에 직원이 일을 처리하는 동안 커피를 대접하여 드리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본인의 가족사를 말씀하였다. 할머니께서는 안 계시고 아들 내외 그리고 손자와 같이 산다고 하셨다. 내가 오실 때 마다 전보다 기력이 안 좋아 보이시니 가까운 지점을 이용하거나 가족과 함께 오시도록 권유를 하였다. 할아버지는 자기가 은행 거래하는 내용을 가족이 알면 안 된다고 하시며 절대 알리면 안 된다고 하셨다. 할아버지는 1층에서 저와 일을 마치고 지하에 있는 대여금고에 통장을 맡기기 위해 가고 나는 점심식사를 하러 갔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대여금고에 갔더니 우리책임자가 할아버지와 1시간이 넘도록 대화를 하느라 밥도 못 먹었다고 투덜거렸다. 한참 뒤에 우리 책임자가 그 손님을 보내고 와서 자초지종을 털어놨다. 우리 직원은 너무나 황당하고 어이가 없다며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 손님이 내게 오셨을 때 우리직원이 나는 커피를 안주고 손님만 커피를 주셨는데 그 커피를 마시고 난 후부터 머리가 이상하니 모든 통장을 다시 점검해 달라고 하더란다. 나는 할아버지가 오시기 전에 이미 여러 잔을 마신 뒤라 할아버지만 커피를 드렸는데 할아버지는 본인에게만 주는 게 처음부터 수상했다고 했다. 나도 그 이야기를 듣고는 너무나 어이가 없어 그냥 웃고 말았지만 그 할아버지가 정말 걱정이 되었다.
그런 일이 있고난 뒤 2-3개월간 그 할아버지 손님이 보이지 않더니 어느 날 서너 명의 가족들이 나타나 할아버지의 사망진단서를 가지고 돈을 모두 인출하여 갔다. 생각할수록 그 할아버지가 눈에 선하였다. 차라리 자신이 좀 쓰면서 손자 용돈도 주고 했으면 좋으련만 아마 그분은 평생 아까워 그 돈을 한 푼도 쓰보지 못하고 돌아가셨으리라 생각된다. 가족들이라도 서로 사이좋게 나눠 잘 사용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요즘 돈이 있으면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말고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농담이 있다. 그러나 유언도 없이 죽은 후 재산이나 돈을 남기고 갔을 때 자식들 또는 친지간의 불화를 많이 보았다. 심지어 은행까지 와서 서로 다투는 경우도 있다. 젊어서 돈을 많이 벌고 재산을 잘 증식 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그 재산을 잘 쓰고 물려주어야 하는 일이 중요한 것 같다.
자식들 싸움시키지 말고 본인도 보람 있는 일에 쓰고 또는 자신을 위해 여행도 다니면서 사용하고 남는 돈은 이웃을 위하거나 좋은 일에 기부하는 문화가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가끔 언론을 통해 어렵게 평생을 고생하며 번 돈을 학교에 기부하거나 병원에 기부하는 사람을 보곤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자식의 Seed money를 위해 본인은 아까워 써보지도 못하고 떠나는 안타까운 경우를 본다. 돈을 벌기는 어렵지만 지키기도 어렵고 잘 쓰기는 더욱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노인들이 은행에 오시면 할아버지의 뒷모습이 자꾸 눈에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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