松珉隨筆房

다듬이 소리

혜안1952 2011. 7. 6. 09:15

          

                   

                             다듬이 소리

                                                                                

                                                                                                                                                     김 수 진


  가을걷이가 끝나자마자 어머니의 다듬이질은 시작된다. 겨울동안 덮을 억센 솜이불의 겉 호청을 풀질하여 말린 후 부드럽게 하기위해서다. 당시 이불은 혼수목록의 일 순위로 시어른과 아이들의 이불까지 하면 집집마다 꽤 여러 채가 되었다. 본격적인 추위가 오기 전에 작년에 덮었던 묵은 이불을 꺼내어 깨끗이 세탁을 한 후 솜을 넣고 겨울을 준비해야 한다.

  세탁기나 다림이가 없으니 고무대야에 넣어 발로 질근질근 밟아 때를 벗기고 냇가에서 헹군 후 곱게 쌀로 만든 풀을 입혀 양지바른 곳에 말린다. 풀 먹은 하얀 옥양목은 뻣뻣해서 그대로 사용하면 피부가 상하기 십상이다. 여인네들은 초저녁에 대청마루에 앉아서 시어머니나 동서와 마주보고 풀 먹인 이불호청을 서로 잡아당기며 편다. 양쪽에서 서로 잡아당기다 장단이 맞지 않아 뒤로 넘어지기라도 하면 깔깔대고 웃곤 한다. 그리고는 보자기에 싸서 삼베로 된 지아비 옷이며 풀 먹은 이불을 힘껏 다듬이질한다. 다듬이질은 혼자보다는 둘이 마주보고 하는 것이 보기에도 좋다. 텔레비전도 없던 그 시절 여인네들은 밤이면 안방이나 대청마루에서 다듬이질을 하며 속으로 노래를 부른다. 시어른한테 야단맞은 속도 사기고 지아비한테 섭섭한 마음도 다듬이질에 날린다. 멀리 사는 친정어머니 얼굴도 그리며 쏟아지는 눈물도 다듬이소리에 묻는다. 다듬이질을 하다가 팔이 아프면 흰 옥양목 천에 포개서 밟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뒷짐을 지고 이리저리 밟다가 힘이 부치거나 잠이 오면 벽을 붙들고 밞기도 하고 아이들에게 밟으라고 시킨다.

   나는 어머니가 다듬이질을 하는 동안 다듬이소리를 음악 삼아 옆에서 책을 읽거나 학교숙제를 했다. 어머니께서 ‘아이고~ 허리야 빨래 좀 밟아라.’ 하면 얼른 일어나 중심을 잡기위해 방안의 흙벽을 손으로 집고 밟아 드리곤 했는데 그 때마다 어머니의 칭찬에 뿌듯했다. 

  빨래를 밟으며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며 도란도란 정을 나눌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다듬이는 방망이가 주로 박달나무로 만들어 가볍지만 단단하고 다듬이질을 하면 그 소리가 탁음이 아니라 청음으로 듣기에 싫지 않았다. 멀리서 이웃집의 다듬이 소리와 희미하게 들리는 개짓는 소리는 시골의 정취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낭만이었다. 어찌하여 채만식은 그 좋은 다듬이 소리와 아기 울음소리를 그토록 싫어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선생은 마실 도 갈 줄 모르고 한 달이면 내내 집에서 글만 읽고 소설만 썼나보다. 아이 울음소리는 나도 좀 거슬리기는 했다. 선생이 유별난지 선생의 아랫방에 세든 아이가 좀 별난지 선생이 스트레스를 꽤 많이 받은 것 같다. 선생의 표현에 의하면 아이가 찢어지게 가난한 어미를 만나 모유도 제대로 나오지 않고 연유마저 살 형편이 안 되었다니 울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아이가 우는 때는 분명 이유가 있다. 배는 골아 죽겠는데 썩어 고약한 냄새가 진동하는 연유를 주니 어찌 안 울고 베기겠는가. 아이가 불쌍하고 안쓰럽지만 철없고 가난한 어미가 무슨 잘못이겠는가. 가난이 죄라면 죄겠지.

  다듬이질은 노동의 연장이자 하루를 마감하며 그 날에 쌓였던 섭섭함을 삭이는 수단이기도 하다. 나는 어머니의 다듬이 소리를 자장가로 알고 잠들곤 했다. 채만식과 나의 입장 차이는 내가 그 당시 아이였었다면 선생은 어른이었다는 것 뿐 이다. 다듬이 소리가 그토록 싫었다니 선생의 말처럼 소가지가 너무 좁은 것이 아니라면 이기적인 게 틀림없다. 양복만 입는 선생의 입장에서는 자기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 훼방꾼처럼 보였다고 하나 다듬이질의 대상이 대부분 이불 호청이라는 것을 정말 몰랐는가. 밤마다 이불을 덮고 잘 텐데 몰랐다는 것도 그렇고 선생은 신식 양복을 입어면서 부인들이 삼베 모시옷을 곱게 차려 입는 것을 왜 못마땅해 했는지.

  나는 지금도 그 다듬이 소리가 그립고 호롱불 아래에서 다듬이질 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보고 싶다. 아마 어머니가 살아계신다면 요즘 며느리나 어머니들을 얼마나 부러워했겠는가. 빨래는 세탁기에 넣거나 아예 세탁소에 맡겨버리고 텔레비전 연속극이나 보고 있으면 되니. 가벼운 와이셔츠나 바지 정도는 집에서 스팀다리미로 몇 분이면 끝난다. 요즘은 허리가 아플 것을 염려하여 서서하는 다리미판까지 나왔다. 아파트는 가만히 있어도 아침마다 「세탁~세탁~」하며 세탁소 아저씨가 노래를 부른다. 그러면 마누라는 집에서 하는 데 무슨 비용이 드는지 세탁소 맡기는 게 값도 더 싸다고 핑계를 대며 얼른 뛰어나간다. 바쁜 직장인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멀쩡한 우리 마누라까지 집에서 놀면서도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그 일이 내일도 아니니 뭐라고 할 수도 없다.

 남의 다듬질을 말길 수도 없을 테고 그 소리가 그렇게 싫다면 슬쩍 마실 을 가면 되는데 선생은 무슨 배짱으로 인내심을 테스트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가난한 아녀자들의 일이기도 하지만 아낙들도 다듬이질하며 쌓인 한을 풀었으리라 생각된다. 무엇이든지 쌓이면 병이되고 곪아터지면 일이 커진다. 다듬이 소리에 훌훌 털어 날려버리고 하루 밤 자고 나면 모든 것이 없어질 터이다. 여인네들이 부엌에서 사발을 깨거나 눈물을 찔끔거리는 것 보다야 낮지 않겠나.

  한편으로는 그 옛날 삼베 모시옷 대신에 양복을 입고 글 쓰는 일로 호구지책을 하였다니 다듬이소리를 이해 못하는 채만식이 부러울 따름이다. 나는 장가 간지 30년이 되도록 아직 한복도 한 벌 없어 명절 때 마다 투정을 부리면 마누라 왈 한복은 비싸기만 하지 일 년에 며칠 입는다고 한 복 타령이냐고 핀잔만 준다. 요즘 신식 한 복은 다듬이질도 필요 없을 텐데 돈 때문인지 관리하기가 귀찮은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그렇더라도 아이들 혼인할 때는 내 한복 한 벌 꼭 해 입겠다고 벼르고 있다. 바지저고리 입고 버선 신고 두루마기 걸치고 서울 시내를 활보 해보는 게 내 오랜 소원이다. 

  지금도 오래된 영화나 광고에 시골 방문 안에서 다듬이질하는 어머니의 실루엣 모습을 보면 자꾸 옛날 일이 생각하고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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