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여행기

희말라야 트레킹을 다녀와서

혜안1952 2011. 2. 4. 20:14

*** 2004년 11월10일~22일 희말라야 ABC 트레킹을 다녀온 것을 기록했던 것을 옮긴 것입니다.

 

희말라야 트레킹을 다녀와서

 

1. 트레킹을 준비하면서


     트레킹을 떠나기 20일전부터 오지여행 전문가인 KBC 이정식 상무님과 준비사항 및 현지사정, 기후 등에 대해 정보교환을 하고 조를 편성하여 준비물을 점검하는 조별모임을 가지며 팀웍을 다졌다. 나는 금년에 두 번에 걸친 지리산종주로 대부분장비가 준비되어 있었으나 겨울 등산복 등 몇 가지를 추가로 구입했다.  그리고 네팔과 희말라야 트레킹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들을 공부했다. 우리 일행중   한분이 대원스님이 운영하는
 http://myhome.naver.com/buddhaeye/main.htm)를 알려주어 많은 참고가 되었다.
    네팔은 인도와 중국이라는 대국사이의 완충국으로 면적은 우리나라의 2/3, 인구 약2000만 명, 1인당 GNP US$180인 빈국으로 유엔이 지정한 보호국이며 1996년부터 내전으로 정정이 불안하여 경제사정이 어렵고 관광객이 많이 줄었다고 한다. 희말라야의 명산외에는 볼것이 없으나 다행히 세계 8000m 이상의 고봉 12개중 8개가 네팔에 있어 입산료등 관광 수입이 전체수입의 30%를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등반가와 트레커들도 많이 가고 있으며 특히 엄홍길씨가 네팔에 있는 고봉들을 모두 올라 가끔 TV에서 히말라야 설경을 본 기억이 있어 낮설지는 않았다..
(*참고:1네팔루피=16원, 1 미달러=76.5네팔루피)

 

2. 인천국제공항에서 카트만두까지
     11월10일(월) 08:20 가이드로 동행하실 KBC의 이정식 상무님을 포함 우리 히말라야 트레킹원정팀 30명은 마치 초등학교시절 소풍갈때처럼 들뜬 마음으로 옷차림도 제각각 다르게 인천공항에 집결했다. 집에서 나올때는 초겨울, 저녁에 묵을 방콕은 한여름, 네팔은 초가을 날씨라니 자기 나름대로 생각해서 입고 온 복장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었다. 모처럼 여행을 나서니 검문검색이 상당히 엄격해진 것 같았다. 출국 수속중 X-Ray 검색대에서 손톱깍기와 등산용칼이 발견되어 다시 나와 타이항공사에 소포로 보낼려고 하니 분실 가능성이 100%란다. 10:50 타이항공 TG629편으로 홍콩을 경유 5시간만에 방콕에 도착하니 벌써 저녁때가 되었다.  그랜드호텔에 짐을 맡기고 바로 한식으로 저녁을 먹은후 약2시간동안 스포츠마사지로 긴장을 풀고 숙소로 돌아왔다.
    11월11일(화) 호텔에서 조식을 한후 태국과 네팔은 공항검색이 더욱 심하다고하여 카메라 건전지와 어제 공항에서 찾은 등산용칼과 손톱깍기를 화물로 보낼 큰배낭에 넣고 짐을 다시 꾸렸다. 방콕에서 카드만두행 비행기가 하루 한번밖에 없어 10:30 발 비행기는 400석이 넘는 좌석이 입추의 여지없이 꽉찼다. 네팔에 석가모니의 탄생지인 룸비니가 있어 성지순례를 떠나는 불교신자들도 많다고 한다. 어제 홍콩공항에서 Transit 할 때 지각으로 비행기출발을 지연시켰던 우리나라 여신도님들 일행은 인도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서울에서 카트만두로 가는길은 상해,홍콩,방콕을 경유하는 세가지가 있는데,우리처럼 방콕을 경유하게되면 하루밤을 방콕에서 자야하므로 이틀이 걸린다. 그러나 얼마전 우리나라와 네팔정부간에 항공협정이 체결되어 내년쯤이면 서울/카트만두 직항로가 개설될 예정이라고 한다. 약 2시간의 비행 끝에 12:35(서울시간 3:50 시차 -3:15)에 카트만두 Trighuvan International Airport에 내리니 군인과 경찰의 경계가 삼엄하다. 지난해 왕자란과 마오이스트 문제로 지나칠 정도로 경비가 삼엄하여 공항에는 장갑차 까지 동원되었으나 장비는 허술하게 보였다. 공항에는 현지가이드를 할 네팔인 라젠드라 샤카와 라젠드라 라마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초면인데도 친근미가 있는 샤카는 작은키에 헐렁한 바지와 털모자 수염 때문에 시골 농부 같았으나 한국말을 꽤 잘 했다. 라마는 공사판에서 일하다 온 막노동꾼처럼 얼굴이 새까맜지만 영어가 유창하고 하얀 이가 보이는 환한 미소는 매우 착해 보였다.

 

3. 카트만두에서 포카라까지
   우리 일행은 네팔의 제2도시이자 트레킹 출발지인 포카라(POKHARA)로 가기위해 바로 옆에 있는 국내선 비행장으로 가는데 고장난 수화물 카터가 여기저기 버려져있고 마치 시골길처럼 비포장 도로를 지나며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경제가 어렵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탑승수속을 하는 국내선 대합실은 우리나라 시골의 버스정류장보다도 작고, 흙먼지 바닥에서 추가 달린 저울로 배낭무게를 재고 있다. 라마는 비행기 좌석이 없어 먼저 떠나고 허름한 커텐속 컴색대를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가니 매점도 있고 화장실도 있었다. 이 나라는 석회질이 많아 물 사정이 나빠서 우선 물 한 통을 사서 마셨다. 처음으로 루피를 사용했다.

   우리가 탈 비행기의 출발시간은 아직도 1시간 가량 남았다. 너무 일찍 들어왔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마땅히 갈곳도 없고, 시원한 여기가 앉을 의자도 있어 좋았다. 20인치 만한 스크린에 나오는 비행기 스케줄을 보니 취소되거나 지연되는 것이 다반사였다.  어느새 탑승대기실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얼굴이나 옷차림으로 봐서 힌두인이 많다. 특히 여자들은 얼굴이 꽤 예뻤다. 우리가 탈 비행기도 지연된다고 한다.   예정된 시간보다도 1시간이나 더 지연된 3:30에 탑승 안내방송이 있어 타러 갈려고 하니 또 몸수색을 했다. 국내선 비행기는 우리 일행 30명이 타니 좌석이 꽉차는 낡은 소형 비행기로 내가 앉은 자리에서 조종석이 훤히 보였고 스튜디어스가 바로 앞에서 주의사항을 영어로 읽는다. 비행기가 이륙하니 사탕 한개와 생수 한잔씩을 주고는 앉아서 영자신문만 열심히 읽고 있었다.  
   약 40분의 비행 끝에 드디어 포카라에 내리니 마치 고향에 온것처럼 시골냄새가 물씬 풍기고 날씨도 좋았다. 무엇보다 석양과 함께 보이는 설산의 연봉들이 멀지만 비행기에서 보다 더욱 또렷이 보여 우리들 가슴을 뛰게했다. 비행장은 허수룩했으며 마치 시골 기차역 같은 기분이 났고 우리는 비행장 안팎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화물차같은 낡은 버스지붕에 배낭을 옮겨 싣고 인근에 있는 Blue Bird Hotel에 도착하니 수위가 거수경례를 한다. 원래는 일찍 도착하여 페와호수가에서 맥주도 한잔하며 석양을 감상하기로 하였는데 비행기가 지연되어 한국음식점인 김치하우스로 바로갔다. 이집 주인은 구륭족인데 한국에서 음식만드는 방법을 배워서 비슷하게 흉내를 내고 있었다. 불고기에 상추쌈과 반주를 곁들여 맛있는 저녁을 먹고 거리의 상점에 나가 이것저것 보다가 100% 파시미나 목도리를 샀다. 원래는 25불인데  좀 비싼듯하여 사지 않을까 하다가 너무 깎는것도 예의가 아닌것같아 18불에 샀다. 집사람은 일체 선물을 사오지 말라고 했지만 우리집에 여자수 만큼 3개를 샀다. 나중에 카트만두에 가서 보니 파시미나는 이곳의 대표적인 상품으로 70%:30%가 제일 좋다고 했다.

 

4. 트레킹이 시작되다.


 <포카라에서 나야풀로 이동>
   11월12일 3일째.   06:00 기상  06:30 식사  07:00 출발  날씨-맑음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트레킹이 시작된다. 멀리 높이 솟아오른 설산들을 보니 가슴이 설레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해 낼수가 있을까하는 두려운 생각이 머리에서 교차되었다. 호텔에서 넉넉히 아침식사를 했다. 앞으로 일주일 동안은 이런 음식을 구경도 할 수 없을테니까.....    은행소식으로 잠시 분위기가 침체되기도 했으나 직장과 가정일은 잠시 잊고 트레킹에만 전념하기로 했다.
   포카라에서 트레킹 출발지인 나야풀까지는 버스로 약 1시간 거리였다. 포터들을 가득 실은 버스가 호텔에서 우리 배낭을 싣고 드디어 장도에 올랐다. 포카라 시내에서 산행때 먹을 과일을 사기위해 버스가 잠시 멈추니 과일을 파는 리어카 행상들이 몰려들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처럼 죽자사자로 덤벼들지는 않았다. 바나나,귤,사과등을 사고 생수를 사는데 시간이 상당히 걸렸다. 산에서는 자연보호구역으로 프라스틱통의 반입이 금지되어 생수를 판매하지 않아 생수물을 사가지고 가던지 산장의 정수용 생수를 이용해야만 한단다. 버스에서는 포터들도 일을 하게 되어서 그런지 기분이 덜떠 있었고, 밖을보니 가게마다 일찍 문은 열고 있으나 사러오는 사람도 물건도 거의 없었다. 약국은 진열대위로 샘플인지 서너개씩만 진열이 되어 있어 내가 어릴 때 산골시장에서 보던 것보다도 훨씬 못했다.  그 옆에는 어학원이 있었다. English, Japanese, German, French, Nepali, Chinese를 가르친다고 되어 있는데 한국어가 없어서 섭섭했고 네팔어를 가르친다는 것이 이상했다. 샤카에게 물어보니 네팔에는 약70개부족이 살며 언어도 각각 다르단다. 거리은 아침이라 매우 깨끗했고 우리나라 1950-60년도와 비슷했다. 동네마다 사는 종족들이 서로 다르지만 대체로 힌두인이 많아 소가 거리를 활보했고 거리 중간중간에 삼성,대우,LG의 color TV 광고가 보여 우리종합상사 직원들이 이 오지까지 와서 전자제품을 판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하였다. 그러고 보니 어제 우리가 묵은 Hotel의 TV도 대우제품이었다. 나야풀까지 가는데는 마오이스트 때문에 여러번 검문을 당했다. 이래저래 50분 거리를 2시간 40분 걸렸지만 우리만 지루하고 이상하게 생각했지 운전기사나 포터들은 어쩔수없지 않느냐는 표정으로 웃기만 한다. 환경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신기하고 안스럽기도 하였다. 우리가 탄 버스가 삐거덕 거리며 구비구비 비탈길을 돌아서 내려갈 때는 금방이라도 굴러 넘어질 것 같아 내려서 걸어가고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야풀에 거의 다갔을 무렵 버스 한 대가 수로에 쳐박혀 있었다. 나야풀은 해발1070m의 조그만 시골마을이다. ABC Trekking Course의 출발지가 아니라면 그냥 지나칠 곳이다.
<나야풀에서 간드룩까지>
    10:40 포터들이 큰 배낭 2개씩을 머리띠로 묶어 이마로 짊어지고 우리는 가벼운 벼낭만 메고 서서히 걷기 시작했다. 가는 길목 양편에는 트레커들을 대상으로 하는 가게들이 길게 줄지어 있었다. 또 길에는 소,당나귀,말들의 오물이 가득차서 앞을 잘 보고 가야 했다. 하산하는 Trekker들을 보니 지친 모습보다는 만족감에 가득했다.  그런데 저 앞에 내려오는 포터 한명이 힘겹게 지나간다. 얼른 뒤돌아보니 몸무게가 소만한 서양여자가 고산증때문인지 실신해서 포터의 광주리에 얹혀 실려가고 있다. 덜컥 겁이 났다. 마을을 지나 산길로 접어더니 우리나라 산길과 다름없다. 큰어려움 없이 점심을 먹기로한 Kimche에 도착했다.  포터들이 밀크티와 차를 가져왔다. 밀크티가 먹을만 했다. 사람숫자가 47명으로 늘어나 식사준비에도 꽤 시간이 걸리고 포터들은 40-50kg의 배낭을 지고 다니는데 식사때는 차와 식사 나르고 치우는 것도 그들의 몫이다. 그러면서도 찡그리는 모습을 볼 수 없다. 식사를 기다리는데 늙은 아버지와 딸이 우리에게 다가와 전통악기를 켜며 노래를 구슬프게 부른다. 뜻은 모르지만 목소리가 맑아 듣기가 좋고 소녀가 너무 귀여워 동료들이 노래값을 주었다. 그들이 가자 이번에는 라마승려들이 독경을 하지만 아무 반응이 없자 그냥 돌아갔다. 드디어 첫 식사로 캬레와 빵, 스프가 나왔다. 식사가 제일 걱정이었는데 그런데로 먹을만 했고 특히 빵은 인사동에서 파는 중국호떡하고 비슷한데 아주 맛있었다. 식사가 끝나고 막 출발하려는데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비가 오기 시작했다. 맑은 날씨에 지나가는 비려니 하고 기다려도 그치지 않는다. 이윽고 빗방울이 점점 굵어져 장대비로 변하더니 땅콩만한 우박까지 떨어진다.

   산에서 사람만 만나지 않으면 마치 우리나라 산을 걷고있다고 생각이 들었는데 그제서야 우리가 열대지방에 와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한시간 이상을 기다려도 비가 그치지 않아 각자 우비를 걸치고 걷기 시작하자 kbc 이상무께서 난감해 한다. 건기라 비가 올 확율은 거의 없으므로 우비는 별도로 준비하지 아니해도 된다고 하신게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비탈진 계곡이 점점 가파라진다. 간드룩은 1940m로 나야풀보다는 870m나 높다. 다시 비가 그치니 맑은 하늘이 보이고 들판에는 가을 추수가 한창이다. Kimche에서 Gandruk까지는 약4km인데 계단이 4,252개란다.예정된 시간보다 늦은 오후 5:30에 드디어 간드룩 Hotel Trekkers Inn에 도착했다. 마당에는 꽃과 잔듸가 예쁘다. 말이 호텔이지 산장이다. 그래도 내방은 운좋게도 화장실과 샤워실이 붙어있다. 간드룩에 오니 안나푸르나와 마차푸처레의 장엄한 설봉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차푸차레는 고기의 꼬리와 비슷하여 Fish Tale 이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Gandruk은 구륭족들이 사는 마을로 ACAP(Annapurna Conservation Area Project)
의 H.Q 가 있다. 희말리야를 등산하거나 트레킹을 하기위해서는 ACAP에 Entry Fee를 내고 허가를 받아야 한다. 나의 Entry Permit No는 56822 이고 매년 약76,000명이상이 찾는다고 한다.  나는 땀으로 흠뻑 젖은 몸을 씻고 침대에 누우니 피로가 엄습해오며 그냥 자고싶은 생각뿐이었다. 밖이 너무 소란스러워 나가보니 이층식당에서 포터들이 악기를 연주하며 한바탕 놀고 있었다. 저녁식사로 캬레밥과 국, 빵, 계란등이 나왔다. 저녁 식사후에는 깜짝파티가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그날이 일행중 한명의 생일이었다. 생일케이크와 주안상이 차례지고 노는데는 2등가라면 서러운 안지점장이 멋진 춤과 노래로 분위기를 잡는다. 샤카가 포터를 대신해 선물로 행운의 노란 실크목도리를 목에 감아준다. 한바탕 떠들고 노니 시간이 금방 가고 피곤이 엄습해와서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잠이 오지않아 화단으로 나와 하얀의자에 앉아 하늘의 별을 감상하니 다른 동료도 몇 명이 나왔다. 그제서야 동쪽 고봉에서 달이 떠오르고 하늘에는 초롱초롱 별이 빛났다.
<간드룩에서 촘롱까지>
   4일째.  산에서 첫 번째 맞는 아침.   6:00 기상,  7:00 아침식사,  7:30 산행시작
간밤에 집사람이 꿈에서 보였다. 궁금했지만 어쩔수 없다. 전날 비온뒤라 날씨가 아주 맑고 좋았다. 아침햇살에 비친 안나푸르나와 마차푸차레의 은빛 설경이 장관이었다.오늘은 촘롱까지 해발로는 230m만 올라가면 되지만 실제는 600m를 내려가서 다시 830m를 올라가야 한다니 단순히 1430m를 걷는것보다는 훨씬 힘들 것 같다. 아마 트레킹일정중 가장 힘든 하루가 될 거란다. 마을을 지나가는데 어린아이들이 세수를 안했는지 코를 흘리며 나마스테(NAMASTE:안녕하세요)하고 달려온다. 사탕을 하나씩 주니 집집마다 아이들이 다 튀어나온다. 마을을 벗어나니 내리막 계단이 시작된다. 여기서부터 청계산 만경대 거리 만큼을 내려 갔다가 북한산 만경대 높이 만큼을 올라가야 한다니 생각만해도 엄두가 나지 않는다. 내리막에는 정말 양폴이 필수다. 여기는 나무보다 돌이 더많아 계단들이 대부분 돌로 되어있고 집들의 지붕도 돌로 만들어진 곳이 많이 있다. 계단을 다 내려가니 맑은 물이 흐르는 큰 냇가가 있어 잠시 웃통을 벗어 땀에 젖은 옷을 바위에 말리고 햇볕을 쬔다. 어떤 동료는 맨몸으로 재빠르게 목욕도 했단다. 그옆에는 우리나라 시골의 물레방아 같은 것이 있다. Kimrong에서 점심을 먹고 그제서야 나의 포터와 통성명을 했다. Barn Bahadur Tamang이라고 해서 타망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KBC 이상무께서 주신 커피쨈을 빵에 발라서 맛있게 점심을 먹었다.  다시 촘롱까지 가기 위해서는 수많은 돌계단과 오르막을 지나야 했다. 특히 탈진할 정도로 가파른 마지막 계단을 지나 촘롱 마을입구에 도착하니 고산병에 대한 경고문이 붙어 있다. < 해발 2,900m~30,000m가 넘으면 고산병이 오고 두통,식욕부진,의욕감소,무기력등 다양한 증상이 오며 고산병에는 약이 없으니 천천히 걷고 알콜(술)을 먹지말고 만일 고산증이 오면 휴식과 하산이 유일한 치료법이다.                                 

   촘롱 도착시간 오후3:40. 오는길이 힘들기도 했지만 소,당나귀들의 오물이 길에 즐비하여 그것을 피하느라고 더욱 신경을 썼다. Chomrong의 숙소는 Excellent View Point Lodge로 규모가 제법 큰 이층집이다. 이곳의 숙소 이름에는 Heaven view hotel, Summit view hotel등 View가 꼭 들어갈 만큼 경치가 빼어났다. 우리가 묵을 숙소도 이름처럼 경치가 정말 좋았다. 건너편에 수백개의 계단식 농지와 집들, 수백미터 아래에서 들려오는 계곡 물소리, 멀리 South Annapurna,Annapurna Ⅰ, Hiunchuli, Machhapuchre등 설산의 연봉들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오늘은 가장 힘든날로 영양보충이 필요하다고 하여 특식으로 양을 한 마리 잡기로 했다. 숙소는 2층에 4인용방을 배정 받았다. 화장실과 세면장이 뒤에 별채로 떨어져 있다. 이층에다 나무로 엉성하게 지어져 저녁에 추위로 고생 좀 할 것 같다. 롯지에서는 자가발전이나 태양열을 이용하므로 온수공급이 넉넉지 않다. 내가 늦었는지 더운물이 이미 떨어져 발과 얼굴만 겨우 씻고 방에 와서 침대에 누웠다. 벌써부터 추위가 엄습해와 침낭속에서 누워있는데 고기냄새에 진동하여 마당으로 내려갔다.  돌판위에 구운 양고기가 먹음직스러웠다. 라마가 긴 막대기로 하나 먹어보라고 건넨다.  잡은지 한시간도 안되어서 그런지 고기 한점으로 저녁내내 먹어도 될만큼 질기다. 고추도 무진장 맵다. 소주가 떨어지고 히말라야 양주(?)가 나온다. 양주라야 소주맛 반도 안된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그래도 사람이 많고하니 고기가 금새 없어진다. 다시 저녁을 먹기위해 식당으로 가니 빵,캬레밥,양곰탕 등 진수성찬이다. 이런 오지 산마을에서 이렇게 포식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앞으로 남은 산행을 위해서는 힘을 비축해 놓을 필요가 있었다. 저녁을 먹고 마당에 나오니 날은 어두워지고 모닥불 주위로 삼삼오오 모여서 그동안 산행 이야기를 서로 나누고 있었다. 저녁에는 동네 주민들이 마을기금 마련을 위한 민속춤 공연을 하기로 되어 있어 모두들 방에 들어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학교 선생님들도 소문을 듣고 왔다.  밤 8시경에 하늘의 별을 보니 평소보다 더 크게 보였고 달 뜨는 모습이 마치 해돋이 같았다. 이윽고 동네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어른 아이 할것없이 대략 20-30명이 마을 촌장님의 인솔하에 몰려왔다.  드디어 공연이 시작되고 무희들이 나와서 춤을 추고 민속북을 두더리기 시작하니 촌장님도 춤을 추기 시작했다. 샤카와 라마도 도저히 못 참겠는지 춤판에 뛰어든다. 술기운이 거나한 우리 동료 서너사람도 합세했다. 축제가 한참일 무렵 KBC 이상무께서 보이지 않았다. 수소문하니 유창한 영어를 하는 건장한 현지인 몇사람과 같이 숙소로 갔단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들이 소위 마오이스트란다. 권총도 차고 있고 장총도 가지고 있었단다. 그들은 우리에게 입산료를 받으로 왔다. 그제서야 촘롱마을 입구의 시멘트문위에 “No Admission without Maoist Permission'라고 종이위에 적은 경고문이생각났다. 

   네팔에서는 6000m 이상을 오르는 등산에는 비싼 입산료를 받고, 그이하를 걷는 트레킹에는 롯지나 식당을 많이 이용하기 때문에 저렴한 입산료를 받는다고 한다. 우리는 이미 포카라에서 1인당 1,000루피(한화 약 16,000원-입산 허가증에는 2000루피라고 되어있음)씩을 지불했는데 마을입구 check point의 정부군은 도망가고 마오이스트들이 다시 받으러 왔다. 이상무께서 할 수 없이 그들과 협상을하여 1인당 500 Nepal Rp씩을 주었단다. 결국 입장료를 억울하게 두번 지불한 것이다. 지난해 입산료 문제로 한국인이 여기서 마오이스트와 다투다가 권총을 머리에까지 겨누는 일촉즉발의 위기까지 간적이 있단다. 그사이 공연장은 난장판이 되고 언제 나타났는지 롯지 아래 빈터에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던 서양친구들도 같이 어울려 논다. 하늘에는 만월에 가까운 달이 비치고 사탕만한 별들로 꽉 찼다. 몇몇 무희들은 익숙한 춤솜씨로 춤도추고 사진도 같이 찍는다. 그러나 아직 어린 처녀들은 부끄러움을 많이타고 돈을 주어도 수줍어한다. 마지막으로 무희들이 우리들 목에 그들이 직접 만들어 온 금잔화 꽃목걸이를 하나씩 걸어주며 트레킹동안의 행운을 빌어주고 그들은 예정된 시간이 훨씬 지난 자정 가까이 되어서 돌아갔다. 춤 값과 금잔화 목걸이 값 등으로 우리가 지불한 돈은 미화100불 이상은 될 것 같다. 미확인 소문에 의하면 그 돈 중 일부를 마오이스트에게 바쳐야한다고 하니 마을발전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산악지방이라 정부군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모양이다.  마을 사람들이 돌아가고 잠 못 이루는 동료들이 아직도 꺼져가는 모닥불 주위를 둘러섰다. 깜깜한 어둠속에서도  먼 설산의 연봉들이 달빛에 비치어 더욱 하얗게 빛나는 모습을 보니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러나 역시 지대가 높은 만큼 밤 기운은 찼다.
<촘롱에서 히말라야까지>
   산에서 3일째(통산5일째) 아침.  안나푸르나와 마차푸쳐레의 꼭대기에 눈보라가 날리는 것이 보일 정도로 날씨가 좋다. 어제저녁 공연 때문에 6시간밖에 못 잤다. 아침 스프로 나온 닭고기도 역시 질겼다. 오전 7:30 산행시작. 여기서는 해가 짧아 아침에 일찍 출발하고 저녁에 최대한 일찍 도착하여 휴식을 취해야한다.  오늘은 Bamboo에서 점심을 먹고 Himalaya(2,920m)까지 가야한다. 동네 아이들의 Namaste 와 Hellow Sweets 이라는 인사를 받으며 마을을 벗어나자 내리막이 시작되고 가파른 돌계단에 야크 배설물이 가득하다. 시누와는 눈앞에 빤히 보이는데도 2시간반이 걸렸다. 우리가 하산할 때 첫날밤을 보낼 Sinuwa에 도착하니 롯지 지붕마다  Running Solar Hot Shower라고 적혀있다. 아마 여기서부터 전기가 잘 안 들어오나 보다. 나무의자에 걸터앉아 숨을 돌리는데  S지점장이 환타를 한턱 쏜다. 허름한 부엌에서 수줍어하는 순달이가 늦은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들은 하루에 식사를 4번씩 한다고 한다. 8시에 빵과 차나 밀크,9-10시에 밥과 캬레,오후2시에 점심 오후5-6시에 저녁을 먹는다고 한다. 부엌에서는 주전자로 차를 다리며 옥수수도 굽고 그위에 천정에서 양고기를 메달아 기름기를 빼며 상하지 않토록 했다. 쉬는 도중 포터들에게 사탕과 쵸코렛을 건넨다. 이들은 한 개를 주어도 꼭 서로 나누어 먹고 혼자만 먹는 법이 없다. 심지어 잘 모르는 포터 끼리도 나누어 먹는다. 산 사이들의 의리인지 고산에서 살아남는 지혜인지 모르겠다. 엄청나게 무거운 짐을 지고도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한체 말없이 오르는 그들을 보니 그들의 고달픈 삶이 짐작이 갔다.

   드디어 정각 12시에 뱀부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한후 오후 1:30에 산행을 시작하였다. 식사시간이 휴식을 할 수 있어 필요하나 먹는 것 자체가 고역이다. 한팀은 휴식시간동안 잠시 짬을 내어 훌라 게임을 하기도 한다. 날씨가 흐리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는 열대우림이다. 좌우로 숲이 우거져 하늘을 볼 수가 없다. 우측 낭떨어지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 뿐이다. 장마때 지리산 뱀사골 물소리처럼 무섭게 들린다. 우기철에는 거머리 때문에 무척 고생을 한다는데 그래도 우리는 다행이다. 건너편 산에서는 산꼭대기부터 폭포물이 쏟아져  하얀 포말을 뿜으며  수십갈래로 찢어져  계곡으로 떨어지는 모습이 장관이다.   이 지역을 지나며 우리는 특히 많은 외국인을 만났다. 유럽인이 주로 많고 미국인과 일본인은 최근에는 많이 줄었단다. 도반까지 1시간 남짓 걸렸다. 산에서 내려오는 물로 수력발전기를 이용하여 약간의 전기를 만들고 있었다. 티벳 문화권인지라 지붕 높이 대나무 깃대에 불경이 가득 세겨진 빨강,파랑,노랑,힌색의 사각천이 바람에 나부낀다. 깃발이 한번 나부낄 때마다 경전을 한번 암송하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단다.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한 후 400m도 넘는 오르막길을 1시간 반만에 걸어서 오후 4시에 Himalaya Guest House에 도착했다. 고도가 3,000m 가까이 되니 머리가 약간 어지럽고 고산증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는 밤에 전기가 없으니 5시경에 저녁식사를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히말라야에서 ABC까지>
    산에서 4일째 아침. 5:30 기상, 6:00 아침식사, 7:00 산행 출발, 오늘은 최종 목적지인 ABC까지 가는 날이다. 벌써부터 온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여기 산장에서는 설봉들의 모습이 고봉들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은 푸른 고봉들을 모두 제치고 마차푸처레를 바로 앞에서 쳐다 볼 수 있는 날이다. 오늘은 평소보다 30분 일찍 출발하였다. 날씨가 좋아서 그럴 염려가 없지만  Avalanche 협곡을 10시전에 통과해야 한다. 그곳은 간간이 눈사태가  일어나므로 햇볕이 따사로워 지기전에 위험에서 벗어나야한다.  1시간 반만에 마지막 휴식지인 Durail에 도착하였다. 오는 길섭마다 들꽃이 많고 취할 정도로 향기가 짙다. Black Tea를 마시며 휴식을 취한 후 가는데 길이 산으로 가지 않고 자꾸 계곡으로 내려간다. 물소리도 점점 위협적으로 들린다. 앞의 산들에 가려 설봉들은 보이지도 않는다. 드디어 Avalanche Track에 들어서니 계곡에는 집채만한 돌들이 여기저기 늘려있고 부드럽게 보이는 모래는 석회질이어서 매우 단단하다. 지난 겨울 산에서 굴러 떨어진 눈덩어리 하나가 아직도 녹지 않고 그냥 있다. 이제부터는 숨이 차기 시작하여 서로가 말이 없고 자기 페이스를 조절하며 걷는다. 한참을 걷다보니 커다란 바위에 동판이 하나 새겨져 있었다. 2002.3.3 네팔인(포터) 1명과 독일인 3명이 Avalanche Track에서 눈사태로 사망하여 그들을 추모하는 내용이었다. 포터의 말을 무시하고 트레킹을 강행하다가 여기서 눈사태에 희생되었다고 한다.  죽은 독일인도 안됐지만 하루에 300루피(약5,000원)를 벌기위해 100kg에 달하는 짐을 지고 산을 오르며 목숨까지 잃는 위험을 감수해야하는 포터들의 생활이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전 11시20분 드디어 마지막 숙소인 MBC(Machhapuchhre Base Camp)에 도착하였다. 눈이 부셔서 설산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날씨가 너무 맑다. KBC 이상무께서 여기는 날씨가 좋아도 ABC(South Annapurna Base Camp)는 또 달라 오후에는 일기 변화가 심하여 설봉들을 볼 수 없을지 모르니 내일 새벽에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다. 그러나 만일 내일 간다면 새벽 3시경에 일어나야 한다는 것과 내일 산행이 하산이라 해도 시누와까지 10시간이상을 걸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우리는 여러차례 협의를 한 결과 간단히 점심 식사를 한 후 오늘 다녀오기로 했다. 나는 고산증으로 입맛이 없어 빵과 스프만 조금 먹고 물과 카메라를 챙긴 뒤  방한복,선글라스,장갑으로 단단히 무장한 후 ABC로 향했다. 고산증과 심한 피로로 도저히 갈 수 없는 동료 6명은 MBC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아마 여기가 식물의 한계지인지 MBC에서 ABC로 가는 길은 누렇게 익은 갈대류만 있는 황량한 벌판이었고 배낭도지지 않은 맨몸인데도 세찬 바람과 안개비로 한발을 내 딛기가 어려울 정도로 숨이 찼다. MBC에서 ABC까지는 완만한 경사지만 고산증으로 머리가 아프고 호홉이 가빠서 빨리 걸을 수 가 없었다.  약430m 의 거리를 2시간만에 겨우 후미로 도착하니 먼저 온 동료들이 서로 얼싸안고 기뻐하며 연달아 후레쉬를 누른다.  그러나 4,130m라는 표지판에서 기념사진을 찍을려고 하니 정작 안나푸르나의 위용은 볼 수가 없다. 이상무의 말씀대로 그 좋았던 날씨가 구름에 가려지더니 도대체 없어지지 않는다. 겨우 잠시 걷혔다가 다시 구름에 갇히고 하여 저 아래 촘롱에서 보았던 위용을 보기가 어렵다. 구름사이로 언듯언듯 보이는 산을 가리키며 라마가 산들의이름을 설명한다. 좌로부터 Hiunchuli(6441m),Annapurna South(7219m),AnnapurnaⅠ(8091m), Baraha Shikhar(7647m), Gangapurna Himal(7454m), Annapurna Ⅲ(7555m),Machhapuchhre(6993m) 등이 병풍처럼 둘러 서있다. ABC Lodge 뒷마당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올라서 구름사이에 간간이 보이는 설봉을 보니 그 웅장함과 아름다움은 설명하기 어려울만큼 신비했다. 롯지 식당에서 S지점장이 밤새 수확한 자금으로 커피를 한잔씩 돌렸다. 큰잔은 양이 너무 많았으나 주인은 무조건  큰잔으로 가지고 왔다. 요금이 거의 2배이니까 매상이 꽤 올랐을 것 같다. 내려오는 길은 숨은 덜 찼지만 맛바람 이라 더 추웠다. 1시간10분만에 내려오니 날이 어둡기 시작했다. 전기가 없으니 랜턴이 필요한데 어제 히말라야 숙소에서 두고 온 것 같다. 여기는 통신수단도 없어 전화도 못하고 숙소도 마침 어제 저녁에 MBC Lodge 주인이 히말라야 롯지 까지 내려와서 예약을 받아갔다고 했다. 나는 ABC에 다녀와서는 이상하게 아무것도 먹기가 싫고 속도 울릉거려 움직이기도 싫었다. 식사도 못하고 겨우 세수만 한채로 침대에 누웠다. 잠은 오지 않는데 움직이기가 귀찮다. 밖에서는 누군가 두퉁이 심해 밤에 하산해야 하느니 하며 법석이었으나 내 몸이 천근이라 남의 일에 귀 기울일 때가 아니었다. MBC에서 마시려고 서울서 가져와 아껴두었던 소주도 못 마셨다. 한참을 자다가 소변 때문에 일어나 밖으로 나오니 깜깜한 밤중에 오염 한 점 없는 하늘에는 별들이 그야말로 금빛처럼 반짝인다. 3700m의 밤하늘에서 본 하늘은 어릴 때 시골에서 한 여름밤에 모깃불을 피워놓고 할머니 허벅지에 누워 쳐다보던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또렸 했다. 결국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다음날 아침까지 잤다.

<MBC에서 SINUWA까지>
   아침에도 식당쪽은 쳐다보기도 싫다. Hot Milk와 계란 후라이 1개로 겨우 아침을 때우고 짐을 다시 꾸렸다.   오늘도 역시 10시전에 Avalanche Track을 통과해야 한다. 내려가는 길은 확실히 더 쉬운 것 같다.그렇지만 가파른 계단이 많아 무릎에는 치명적이다. 폴에 의지하여 조심조심 걷지만 속도는 올라 올 때 보다 배를 내야한다. 도반에서 점심을 먹고 시누와까지 갈려고 하며 어쩔 수 없다. Hinku 동굴을 지나  Himalaya Lodge에서 잃어버린 헤드 렌턴을 찾을 겸 잠시 들렸으나 이틀이 지나서인지 결국은 아쉽게도 찾지 못하고 도반까지 왔다. 그 때 까지도 입맛이 없었으나 다행히도 한 동료가 햇반을 주어서 물에 말아서 먹으니 먹을 만 했다. 어제는 그동안 아껴두었던 라면도 보기 싫어 MBC에서 포터들에게 모두 주었었다. 점심을 먹고 내려오는데 한국인 가족이이 식사를 하며 인사를 했다. 전 북경지점장이셨던 조화수 선배님의 친구 분이시란다. 부인과 따님을 데리고 가족트레킹을 오셨다고 했다. 용기가 대단히 부러웠다. 또 머리가 하얀 60-70대 일본 노인들이 단체로 노익장을 과시하며 트레킹을 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건너편 계곡에는 햇빛이 쨍쨍한데 우리 쪽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울창한 열대 우림 지역이라 나무가 우산이 되어 옷은 적지 않으나 걱정이 되었다.
   MBC를 출발한지 7시간만에  Sinuwa Guest House에 도착하여 3일만에 온수로 목욕을 했다. 기분이 상쾌하고 좋았다. 전기가 없어 일찍 저녁을 먹는데 비가 다시 쏟아진다. 일찍 잠자리에 들어도 잠이 오지 않는다. 올라 갈 때처럼 긴장감이 없다. 옆방에 가보니 역시 잠이 오지 않는 동료 몇 명이 동양화를 하고 있다. 나도 슬쩍 끼었다. 밖은 아직 빗방울소리가 들렸다. 한참후 문이 열리더니 포터 한 명이 술이 취해서 왔다. 포터들도 긴장이 풀렸는 모양이다. 내일을 생각해 가서 자라고 했더니 흙으로된 방바닥에 넘어져 그냥 잔다. 자기들끼리 술 한잔씩 했나보다. 이해가 갔으나 다시 일으켜서 자기들 방에 가서 자도록 했다.  그러나 화장실에 가기 위해 밖을 나오니 방문 앞 흙바닥에 쓰러져 자고 있었다. 비는 그쳤어도 바깥 날씨가 꽤 춥다.  그냥 두면 얼어죽을 것 같아 다른 포터들을 깨워서 데리고 가도록 했다. 우리도 어느 듯 촛불이 다되어 가서 잘려고 하는데 누군가 가스등을 빌려왔다. 하루저녁에 사용료가 20불이란다. 불 값치고는 엄청나게 비싸다.
<시누와에서 란드룩까지>
    산에서 6일째.TV 와 신문을 안보니 날짜개념이 없다. 오늘은 Hot Spring에서 노천온천을 하고 Jinu Danda에서 점심을 한후 란드룩까지 가야 한다. 어제밤에 높은 산에는 비 대신 눈이 왔는지 가까운 고봉들은 설산으로 변했다. 7시10분에 촘롱을 향해 출발했다. 올 때와 반대로  촘롱은 냇가까지 내리막을 걷다가 수많은 돌계단을 다시 올라가야 했다. 돌층계가 셀 수도 없을 만큼 끝없이 이어졌다. 촘롱은 그래도 ABC Tracking Course 에서는 제일 큰 마을로 다른 마을은 여기서 물건을 사다가 판다고 한다. 어떤 상점은 Wholesale Store라고 쓰여져 있다. 학교도 있다. 교문 앞에서 아동들과 선생님 한 분과 같이 사진을 찍고 보내주겠다고 하니 따라 오란다. 벽돌로 지어진 엉성한 건물로 갔다. 내심 겁이 났다. 소위 교무실에는 나무로 된 탁자와 새카맣게 그을린 주전자와 석유버너가 있었다. 차를 대접하겠다고 하여 시간이 없으니 이메일 주소나 적어달라고 하니 종이가 없다고하여 내 배낭 수화물 Tag에 겨우 적어왔다. 선생님 이름은 Mom Nath로 영어 외에 서너 과목을 더 가르치고 교사 8명이 초. 중학생 160명을 가르치며, 수업은 오전 10시에 시작되어 학년에 따라 12시에서 오후4시까지 한다고 한다. 마을에는 약100여 가구에 인구가 4-5 백명쯤 될 거란다. 

    올라올 때 묵었던 Excellent View Point Lodge를 지나 촘롱 마을을 벗어나니 지누로 가는 길과 간드룩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으로 들어서니 저 아래 지누가 멀리서 보이는데 계단이 너무 가파르고 어떤 곳은 경사가 70도가 넘는 곳도 있다. ABC 트레킹에 있어 침낭, 양폴, 물은 필수라고 생각된다. 롯지 외에는 물을 먹을 수 있는 곳이 한군데도 없다. 지누는 촘롱에서 약 400m를 내려 가야하니  가파를 수밖에 없다. 맞은편 계곡 건너에는 집도 몇 채 안 되는데 계단식 농지가 수 백개는 될 것 같다.  지금은 추수가 끝나고 비어있어 누가 무슨 농사를 짓는지 궁금했다. 기진맥진 간신히 지누 가까이 오니 hot spring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왔다. 어떤 동료들은 지친 몸에 온천 해봤자 또 땀에 젖는다면서 식당으로 바로 갔다. 그러나 여까지 와서 노천온천을 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될 것 같아서 내려가니 온천은 의외로 멀리 있었다. 우거진 열대 우림을 지나 냇가에 다다르니 물가 바로 옆에 돌과 시멘트로 만든 탕이 3개 있었다. 물은 아주 뜨겁지 않지만 계곡 물가에 이런 온천이 있다니 정말 신기했다. 온천 주변에는 야생 원숭이들이 떼를 지어 살고 있다. 한 10분 정도 온천을 끝내고 식당으로 오니 다시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고 다리만 아파 괜히 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입안도 헐기 시작했다. 지누 식당은 노천온천을 개발한 주인이 운영하여 온천욕탕 비용은 무료로 했다. 식당에는 서양인들도 꽤 많이 있었다. 아직까지 입맛이 없어 할 수 없이 매점에 가서 사과1개(30루피)와 환타 1병(40루피)을 사서 감자와 같이 먹었다.  마당 좌판에서 $10 하는 목각 코끼리 인형을 $3에 샀다. 지누는 언덕 중간에 있어 New Bridge 까지는 4-500m를 더 내려가야 했다. 거기까지 약 2시간정도 걸린 것 같다. 여기서부터는 계곡을 왼쪽으로 끼고 걷는다. 한쪽은 천길 낭떨어지 이고 중간중간에 갈림길이 있어 헷갈린다. 먼저간 샤카가 길바닥에 화살표시를 해두었다. 라마가 길잃은 인원을 체크하기 위해 산길을 마치 평지처럼 뛰어다닌다. 중간중간 바나나나무에 바나나가 달려있어도 따먹을 힘이 없다. 거꾸로 이 길을 올라오는 사람들도 더러 있지만 너무 힘들어 보였다. New Bridge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200m 더 높이에 있는 Landruk 까지 2시간을 걸었다. 마을입구에 들어서니 마오이스트들이 그들의 주장을 담은 구호를 적어 여기저기 붙여놨다.
  1)Let's Establish 'Republican Nepal'
  2)Desolve-so called Royal Army
  3)No Foreign Army involvement,it is our Nationalistic & Democratic War
                                                - CPN(MAOIST)
하필이면 숙소로 정한 롯지가  마을의 가장 윗쪽에 있어 한발자국도 움직이기 어려운 상황에서 다소 원망스러웠다. 마을 중간에는 망루 비슷한 5층집도 있었다. 우리가 워낙 인원이 많다보니 롯지를 2개나 빌렸다.    나는 아래쪽에 있는 New Hotel Sherpa 의 아담한 2층 가운데 방을 배정 받았다. 바로 앞쪽 건너편에는 트레킹 첫날밤을 잤던 간더룩 마을이 보였다. 두 마을은 계곡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며 주로 Gurung족들이 살고 있다.

    우리는 오늘이 산에서 마지막 밤이므로 배낭 속 먹을 것은 전부 꺼내서 식당으로 모였다. 식당 반찬에다 우리 반찬을 모두 차리니 식탁이 가득 찼다. 모처럼 트레킹 팀장님 덕택으로 맥주도 한 잔 했다. 식사후 우리들은 자기 포터에게 한명 한명씩 별도로 수고비를 주고 Best Porter도 뽑아 시상을 했다. 또 샤카와 라마에게도 팁을 주었다. 잠시후 포터들이 고마움의 표시로 이벤트를 하겠다고 했다. 그들은 별도로 주문을 했는지 Cake를 가지고 와서 라마가 영어로 성공적인 트레킹에 대한 감사와 축하인사를 하고 춤과 노래로 우리를 즐겁게 했다.  축제에 술이 빠질 수 없다며 이정식상무께서 비싼 맥주를 왕짱 사셨다. 맥주는 덴마크 코펜하겐과 제휴하여 만들었다는데 우리나라 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맛이 좋았다. 포터들은 대부분 체격이 왜소하고 신발도 고무로된 슬리퍼를 신었는데 그험한 산길을 그것도 50kg나되는 배낭을 이마에 이고 일주일씩이나 다니고도 저렇게 춤추고 노는 것을 보면  살기위한 정신력과 낙천적인 그들의 민족성 때문인 것 같았다. 이동네서도 마을발전기금 모금을 위해 동네 아낙네들이 민속공연을 하겠단다. 롯지 주인에게 모닥불을 피워달라고 하였더니 없다고 한다. K 형이 눈치 빠르게 5불을 얼른 찔러준다. 없다는 장작은 밤새도록 꺼질 줄 몰랐다. 동네 사람들이 촌장님을 앞세우고 롯지로 들어섰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이국적인 사람이 많고 너무 예쁘다.  이상무께서 인물사진 찍느라고 사탕을 있는데로 다 준다. 춤과 노래가 시작되고 우리 일행도 마지막 밤이 아쉬운 듯 같이 어울려 논다. 그런데 노래방 체질이라 가사를 제대로 아는게 없어 노래가 이어지지 않는다. 할 수 없이 촘롱에서 포터들에게 배운 ‘얼 삼 삘리리’만 반복했다. 춤판은 곧 마을의 축제가 되어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와서 같이 즐기는 것 같다.우리들은 공연값과 금잔화 목걸이 값으로 각자 성의대로 기부를 하고 한바탕 춤판은 막을 내렸다. 다시 산장은 밤이 깊어지고 모닥불도 꺼질 무렵 마지막 밤이 아쉬운 듯 동료들이 모닥불 주위로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땅에는 모닥불 멀리 건너 마을 간드룩에는 전기불이 반짝이고 하늘에는 별들이 더욱 초롱초롱 빛나는 가운데 마지막 밤이 깊어 갔다.
<란드룩에서 포카라까지>
     트레킹 마지막 7일째  6시 기상,  7시 출발. 날씨는 더없이 좋음.
오늘은 Deurali 까지 600m를 올라가서 Pothana에서 점심을 먹고 버스가 대기하는 Phedi까지는 다시 1,000m를 내려가야 한다. 길고 험난한 코스지만 하산길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가볍다. 더군다나 트레킹을 시작하기 위해 무거운 배낭을 지고 이제 막 올라오는 사람들을 보니 괜시리 안스럽다. Talka를 지나 Deurali 까지 오니 동네입구에  지나가는 트레커를 대상으로 마을기금 모금함을 설치를 해 두었다. 집들이 양철지붕인 것을 보니 도시가 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Deurali는 높은 언덕에 위치하고 있어 전망이 아주 좋고 설산 연봉들도 잘 보여서 포터들과 멀리 사우스 안나푸르나를 배경으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간식으로 환타와 사과가 최고 인기다. 사과라야 키위만 한데 맛이 괜찮다. 이제 어려운 고비는 다 지나고 내려가는 길만 있으니 훨씬 마음도 가볍다. 어느듯 포타나에 오니 외국인도 많고 롯지마당에는 의자가 많이 있어 휴식 겸 식사하기가 좋다. 날씨가 맑으니 전망이 아주 좋다. 가끔 구름이 가리기는 하지만 마차푸추레가 아주 잘 보인다. 점심때 삶은 감자가 아주 맛이 좋았다. Deurali에서 Dhampus까지는 길이 완만하고 어떤 곳은 잔디같은 풀이 마치 골프장 Par 3홀은 될 정도로 퍼져있다. 북한산 비봉능선처럼 주로 왼쪽이 확터여서 경치가 아주 좋다. 담파스 근처에는 그 높은 산에 연못을 파놓고 일광욕을 위한 안락의자도 갖춘 고급산장도 있었다. 아마 벌거벗고 누워있기 좋아하는 유럽사람들이 주로 묵는 숙소인지도 모르겠다. 담파스는 마을도 꽤 크고 학교에서 아이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다. 거기서도 학교기금을 모금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고 짓다만 건물도 보인다. 담파스에서 페디로 가는 길은 정반대로 남쪽으로 가는데 처음부터 돌계단이 시작되어 500m를 다 내려 올 때까지 급경사가 계속되어 오르막 보다도 더 힘들었다. 내려가는 도중에 멋쟁이 모자를 쓴 중학교 선생님을 만났다. 자기집은 Phedi에 있고 일이 있어서 집에 들렸다가 포카라에 가야 한다고 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수상이 김x순 아니냐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사람이 없어 다시 물어보니 북한 수상을 말한 것이었다. 그들은 북한과 남한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그래서 마오이스트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매우 위험한 인물들이라고 답하여 북한도 마찬가지라고 알려 주었더니 그제서야 이해한다는 표정이다.
내려가면서 짧은 영어지만 가족이야기며 여러가지 대화를 하면서 같이 걸었더니 덜 지루하였다. 나중에 집에 들러 가방을 메고 와서 자기는 차시간 때문에 빨리가야 한다며 나에게 덜익은 돌배같은 과일을 하나 주고 가서 겁데기를 벗기고 먹으니 맛이 있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도중  아주 오랜만에 우리나라 젊은이를 만났다. 여자2명과 남자1명이 포터도 없이 우리가 내려오는 길을 반대로 올라간다. 아무리 젊지만  너무 무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수천개의 돌계단을 지나 Phedi에 도착하니 벌써 일행의 2/3가 내려와서 일일이 격려의 악수를 하고 라마는 환타를 한잔씩 돌린다. 속세로 돌아온 나는 몸무게가 5kg는 빠진 것 같았다.
<페디에서 다시 포카라로 돌아오다>
    모두가 무사히 트레킹을 마치고 내려왔다. 마지막 돌계단에서 기념사진 촬영을 하고 버스에 올랐다. 오늘 버스는 올 때와는 다르게 인도 TATA자동차에서 만든 최신형으로 이곳에서도 보기가 드물며 오늘 카트만두에서 우리를 싣기 위해 5시간을 달려 왔단다. 버스에 오르자 모두들 극도의 피로로 하나둘씩 잠들기 시작했다. 포카라의 Blue Bird Hotel에 도착 할 때까지 버스 안은 한밤중처럼 조용했다.  모처럼 문명의 세계로 다시 돌아온 느낌이었다. 호텔에서 목욕을 하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갈아 입은후 Phewa 호수가에 있는 교포가 운영하는 천지가든으로 갔다. 이곳 사장님은 전북 군산이 고향이신 분으로 ABC코스 산장마다 식당 광고를 부착하여 우리도 사실은 그 광고를 보고 찿아 갔다. 알고 보니 포카라에 2개 카트만두에 1개의 식당을 운영하는 식당그룹 이었다. 식당은 호수가에 꽤 넓게 자리 잡았고 본관과 여러채의 별채로 되어 있었다.  서쪽은 마침 일몰시간이어서 낙조가 아름답고, 북쪽은 해운대 달맞이 고개처럼  운치가 있었다. 포카라는 도시자체가 뒤로는 설산이 안으로는 푸른 고봉들이 에워싸고 있고 산과 호수가 잘 조화를 이루고 있어 휴양도시 답게 정말 아름다웠다. 야외 파라솔 밑에서 운치있는 호수를 보며 맥주를 한잔하니 피로가 싹 가시는 것 같았다. 다시 대형식당으로 옮겨 삽겹살에 네팔양주를 먹으니 술과 고기가 항상 부족하다. 서울서 한달전에 이곳으로 자원하여 파견 나왔다는 히말라얀 티앤티의 한수빈씨도 음식 나르기에 바쁘다. 그러고 보니 여기와서 산을 일주일이나 다녔는데도 무덤과 돼지를 보지 못했다. 인구의 75%가 힌두인들이라 죽으면 화장을 하고 소고기와 돼지고기는 먹지 않으나 불교도들은 돼지고기는 먹는다고 했다.  나의 인생에서 최고로 기분이 좋은 상태에서 호텔로 돌아와 집에 처음으로 전화를 했다. 룸에서는 국제전화가 안되어 호텔 프론터에서 신청했더니 손목시계로 시간을 잰다. 3분에 12000원이란다.  일부 동료는 밤중에 포카라 시내로 가서 한잔 더 하고 오기도 했다.
<포카라에서 카트만두까지>
    5:30 기상 6:00 식사 6:30 출발
    호텔 옥상에서 마지막으로 희말라야 연봉을 감상하고 사진을 찍었다. 오늘은 버스로 카트만두까지 이동해야한다. 올때는 비행기로 50분 걸렸는데 갈 때는 버스로 5시간정도 걸린단다. 아무리 차가 좋아도 시속 60km이상 달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길이 좋지 않단다. 아침 일찍 길을 나서니 가을 안개가 거리에 자욱하다. 시외버스 터미널은 폐차장처럼 버스가 빽빽히 서있었고 재래시장에는 아침시장이 서는지 인파가 넘쳤다. 수도로 가는 국도는 왕복 2차선으로 중간 중간에 대우, 삼성,LG TV 광고판이 보였다. 동네마다 같은 종족들이 모여서 살며 카스트제도 때문인지 외관상으로는 평화롭게 보였다. 그러나 다리나 큰 마을을 지날 때는 군데군데 검문을 하고 있다. 검문소를 통과할 때 우리같은 외국인은 그냥 통과하고 네팔인들은  내려서 걸어 가야한다. 도로 옆으로 흐르는 강에는 래프팅을 하기도 하나 지난 여름 수해로 도로가 여기저기 유실하기도 하고 피해가 많아 보였다. 길은 마치 속초에서 한계령을 넘어 서울로 오는 길 같았다.  너무 지루하여 한참을 자고 일어나니 카트만두 외곽까지 왔는지 또 검문을 한다. 포카라에서 카트만두 까지 오는데 8-9번의 검문을 통과하여 예정된 시간보다 훨씬 늦은 7시간만에 도착했다. Kathmandu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 쌓인 표고 1400m의 분지 도시로 시내 중심가로 들어서니 소음소리에 정신이 어지럽다. 카트만두를 카메라에 다 담을 수는 있어도 녹음기에는 다 담을 수 없다고 하더니 그 말이 실감이 간다. KBC이정식 상무께서 20년 전에 왔을때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단다.  거리의 매케한 연기, 우중충한 건물, 초라한 옷차림, 거무티티한 얼굴은 도시 전체를 어둡게 하고 있다. 그래도 거리에 다니는 사람들 대부분은 이마에 새빨간 곤지를 찍고 있다. 그것은 오늘 하루 무사를 빌며 아침에 집에서 기도를 드리고 어머니나 아내가 붙여준 일종의 부적 같은 것이란다.  네팔 남자들은 야위고 구리같은 얼굴 색갈로 볼품이 없으나 여자들은 대개가 미인이다. 시내에는 은행간판도 가끔 보이고 24시간 ATM기도 있지만 장사가 안돼 문을 닫는 지점도 있단다.  우리 일행은 왕궁앞에 있는 한국음식점에서 점심을 먹고  이곳 최대의 번화가인 Durbar광장을 찾았다. 고대 카트만두의 중심지역이었던 이곳은 대개가 12C~18C에 지어진 목조건물로 수많은 상점과 과 유적들이 혼재 되어 있고, 20C초까지만 해도 왕이 살던 네팔의 살아있는 박물관이다. 원숭이 신인 하누만 상이 여러 가지 색깔의 페인트와 금잔화 꽃으로 어지럽게 장식되어 있었고, 어떤 시바사원은 추녀밑에 보기에도 민망한 적나라한 성애장면을 부조하여 놓았다. 건물이나 조각품을 보노라니 목조가공 기술이 뛰어나고 더군다나 우리나라와는 달리 외세의 침입이 한번도 없어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지만 경제사정으로 관리가 부실한 것이 안타까웠다. 더군다나 사원 주위는 장사꾼들이 건물 안팎을 점령하고 있어 유서깊은 사원들이 방치되는 듯하여 먼 훗날 후세인들이 이귀한 유물을 볼 수 있을지 염려되었다.
   광장근처에는 살아있는 여신이 있는 Kumari Ghar로 갔더니 □자 구조로된 목조 이층건물이 사람이 많아서인지 좀 답답해 보였다.  정면의 2층 창문에 빨간 천이 아래로 내려져 있느데 쿠마리(살아있는 여신)가 가끔 관광객들을 위해서 얼굴을 5초정도 내 보인단다. 관광객들은 언제 쿠마리가 나타날지 몰라 2층 창문만 쳐다보고 있는데 샤카가 오더니만 3개월 전부터 쿠마리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물론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아쉽지만 건물내에 있는 선물가게에서 파는 사진으로 쿠마리 보는 것을 대신했다. 쿠마리는 네와르족 중에서 집안이 좋고 건강하고 용모가 뛰어난 6~8세의 여자아이를 승려, 브라만, 점성가등으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뽑아 여신으로 모신다고 한다. 쿠마리는 일년 중 축제때 한번만 외출이 허용되고 첫 번째 생리가 시작되면 그 집에서 나와 학교도가고 결혼도 하지만 사회적응을 하지 못하고 불행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쇼핑가인 다멜 상가로 갔다. 남대문시장처럼 갖가지 상점이 즐비하다. 네팔의 가장 유명한 토산품인 Pashmina(산양 속털로 만든 모피제품)는 포카라에서 샀기 때문에 우리집 꼬마녀녁의 T-Shirts와 안나푸르나 연봉들이 있는 사진을 하나 샀다. 쇼핑을 끝내고 하이야트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호텔은 공항 가는 길목의 약간 외곽에 있었고, 높지는 않지만 넓은 대지 위에 웅장하고 고급스러웠다. 마지막 저녁식사는 이곳 민속식당인 Bhanchha Ghar에서 하기로 했다. 1층 식당에서 인도식의 저녁식사를 하고 이층으로 올라가니 무희들이 나와서 춤을 추며 간장 종지 만한 접시에 술을 한잔씩 준다. 술은 안동소주처럼 맑고 독했다. 옆자리에는 이곳 부유층인 듯 한 젊은이들이 여자친구와 같이 고급안주와 술을 즐기고 있었다. 빈부의 격차를 실감할 수 있다. 무희들은 예뻤고 춤도 잘 추었지만 친근미나 성의는 없이 그저 상업적인 공연이었다.
 
<카트만두를 떠나가전>
호텔에서 마지막 아침을 먹고 우리 일행은 오전동안 몇 군데를 더 관광하기로 했다.  우리 일행은 우선 영화“리틀 부다”로 유명한 보다나트사원(Bouddhanath Stupa)으로 갔다. 전체인구의 약15%내외가 불교신자고 그 대부분이 티베트인으로 이 사원 근처의 상점과 사람은 모두 티베트풍 이었다.  사원 안에는 달라이 라마의 사진이  크게 걸려있었다.  세계의 문화유산이자 네팔 최대의 불탑인 Stupa는 반지구위 모양 위에 사각형으로 된 사면이 있고 제3의 눈이라고 하는 커다란 눈이 사방을 내려다보고 있다. 네팔리들은 아침 일찍 장사를 나가기 전에 여기 와서 Stupa의 외벽을 돌며 마니차를 들고 옴마니반메홈을 외며 기도를 드리고 간단다.  이 사원은 언제 누구에 의해 세워졌는지 아직도 모른단다. 다만 Jyajima라는 소녀가 4명의 남자에서 각각 아들을 얻어 네 아들의 도움으로 이 성서러운 토지를 구입해 왕의 허락을 얻어 이 사원을 건축하다 죽고 그의 네 아들들에 의해 이 사원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Stupa는 3층으로 되어있고 1934년 네팔 대지진 때도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이곳은 티베트 불교도에 더 인기가 있으며 특히 매년 신년에 축제가 열리고 매12년마다 큰 축제가 열리는데 이는 사원이 12년만에 세워졌다고 믿기 때문이란다. UNESCO는 1979년 카이로에서 이 사원을 카트만두의 다른 6개 유물과 함께 세계 문화유산 보호대상으로 지정하였다.
   마지막으로 우라가 들린 곳은 힌두교 성지이자 세계 3대 힌두 사원중 하나인 파슈파티나트 사원이었다. 사원보다는 화장터로 더 유명한 곳으로 가운데 흐르는강이 바그마티강 이라고 한다. 강이라기보다는 건기라서 그런지 물이 겨우 발목정도 밖에 안 오는 메마른 개천이었다. 입구에 들어서면 강을 따라 좌측에 하얀 죽음의 집(노인들이 임종을 기다리는 곳)이 있고 그 위쪽에 화장터인 시멘트 가트가 있다. 어떤 곳은 이미 장작불이 사그라들기도 하고 막 도착한 시신이 황포에 쌓여 강물에 비스듬히 내려져 있기도하다. 사원앞 다리를 중심으로 강 아래는 서민들의 화장터고 위쪽은 가트가 두 개뿐인 귀족들의 화장터라고 한다. 화장은 대개 오전에 하며 거의 매일 화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다리 윗쪽에서 막 화장준비를 하는데 문상객들이 많은 것을 보니 역시 귀족 출신인 모양이다.   시신을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상주인 두 아들이 웃통을 벗고 아래쪽만 힌 상복을 입고 고인이 된 아버지 발을 붙잡고 차례로 하직인사를 한다. 불은 목덜미 밑에서 시작하여 장작더미 전체로 활활 타오른다. 아마 서너 시간은 걸린다고 한다. 화장터 바로 옆에서는 어린아이와 아낙네들이 강에서 손발을 씻으며 떠들고, 사원 위에서는 신도들이 화장하는 모습을 내려다보고, 다리 건너서는 이 신기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관광객들이 바쁘다.
인도의 바라바시시에 있는 갠지스강 화장터에서 죽음을 맞기 위해 전국에서 임종을 앞둔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과 같이 저 밑의 죽음의 집도 여기 사람들은 무크티바반(구원의 집)이라고 부른단다. 화장된 시신은 한줌의 재가 되어 바그마티강에 뿌려지면 언젠가는 갠지스강을 거쳐 인도양으로 가서 다시 비가 되어 대지로 환생한다는 윤회설을 믿기에 사랑하는 가족을 기꺼이 떠나보낸다고 한다.
  화장터 맞은편 돌층계를 올라가니 남녀성기를 조형화한 이상한 전각들이 죽 서있다. 그 위에서는 마리화나를 피우며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기이한 모습을 한 두 사람이 하도 신기해 사진을 찍을려고 하니 아예 포즈를 취한다. 그리고는 모델료를 요구한다. 카트만두가 히피들의 천국이라고 하더니만 여기를 두고 말했나보다. 하기야 저 건너 화장터를 매일 보노라면 그렇게 살고 싶은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아등바등 하며 살기보다는 하고 싶은 데로 살다가 다음세상에서 새가되어 훨훨 날아다니면 될 것을....이곳 역시 유물들의 손괴가 심한데 외국인들한테만 입장료를 받는다고 한다. 윗쪽에서는 어떤 농부가 벼를 뿌리며 내년에 풍년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내려오면서 보이는 파슈피트나트사원 본당은 시바신을 모신 사원으로 모태신앙이 힌두인들만 들어 갈 수 있단다.  사원을 떠나며 강건너 화장터와 죽음의 집을 우두커니 서서 쳐다보니 인생이란 그저 한 마리 불나방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렀다.
  열 이틀간의 여정을 끝내고 공항정문에 들어서니 내국인은 못 들어간다고 했다. 상황이 올 때보다 더욱 나빠진 것 같다. 그동안 정들었던 샤카와 라마를 떠나보내려 하니 그들도 울먹이고 우리도 정말 아쉬웠다. 입국 장에서 비행기 탑승대기실까지 가는데 여러 번 검색을 받아야 했다. 좁은 대기실에서 지루한 기다림 속에 서울서 같은 비행기를 타고 왔던 불교성지 순례단을 거기서 반갑게 다시 만났다. 대기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꽉 차니 탑승이 시작되고 비행기 바로 밑에서 남녀로 나뉘어 다시 몸수색을 당하고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드디어 비행기가 이륙을 하니 마치 어두운 긴 터널을 빠져 나온 것처럼 답답했던 가슴이 시원해지고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안나푸르나 설산의 연봉들과 산간마을에서 나마스테와 스위트를 연발하던 코흘리게 아이들 그리고 가이드이자 동생 같았던 샤카와 라마의 모습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여행일기를 마치며...

 

    여행일기를 여러 번 쓰려고 시도하다가 엄두가 나지 않고 한번도 이런 글을 쓴 일이 없어 많이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저 나름대로 용기를 내어 기록으로 남기게된 첫 번째 이유는 제가 트레킹을 떠나기 전 여러 가지 자료를 찾아 읽어보았지만 실감이 나지 않아 실제 겪은 일을 기록으로 남겨 저처럼 처음 티레킹을 시도하는 분 들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고, 두 번째는 우리 트레킹팀이 한때 동거동락 했던 것을 되돌아보고 그때의 순수한 마음을 오래도록 간직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저 개인적으로 너무나 큰 경험을 하게되어 가슴 벅찼던 순간들을 언변 부족으로 다 표현할 수 없어 친한 지인에게 들려주기 위함입니다.  저의 짧은 상식과 희미한 기억으로 내용이 틀린 부분이나 실제와 다른 것이 있을 수도 있사오니 넓은 아량으로 혜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저나 같이 갔던 우리일행 모두가 일이 바쁘고 살다보면 짜증이 나거나 가슴이 답답할 때 촘롱과 란드룩의 순박한 어린이들과 낙천적으로 사는 네팔리들, 마차푸쳐레와 안나푸르나의 아름다운  설산들, 그리고 바그마트강가의 화장터를 생각하며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나마스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