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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태석 신부의 휴먼 다큐멘터리

혜안1952 2011. 1. 8. 14:05

저도 이 영화를 보지 못하여 아쉬워 하던 차에 어느 선배님이 오늘 보내왔습니다.

 

    

 

 

◆ Subject: 故 이태석 신부의 감동 휴먼 다큐멘터리다


지난 부활절에 한국방송(KBS)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KBS스페셜-울지마 톤즈’가 영화로 만들어져

8월 27일 서울극장 2관에서 시사회를 한 후

9월 9일 상영관에서 개봉된다.

이 영화는 아프리카 톤즈에 위대한 사랑을 선물한 한국의 슈바이처

고 이태석 신부의 감동 휴먼 다큐멘터리다.

아프리카 수단의 원주민들을 위해 의사신부로서 온몸을 바쳐 활동했던

이 신부는 2008년 10월 휴가차 한국에 들렀다가

말기 대장암 판정을 받고, 투병 끝에 지난 1월 14일 선종했다.

그는 투병 중에도 톤즈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고 한다.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신부가 된 이 신부는 수단의 작은 마을 톤즈에 정착해

병원과 학교를 짓고, 밴드를 결성하는 등 이곳의 아이들에게 꿈을 선물했다.

그는 톤즈의 아버지이자, 의사였고, 친구였으며,

천박한 땅 톤즈에 희망의 씨앗을 심어준 선구자였다.

톤즈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졌지만 갑작스런 암 선고로 마흔 여덟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의 불같은 삶을 그린 ‘울지마, 톤즈’는

9월 9일 스크린을 통해 만날 수 있다. 

구수환 PD님과 제작진(작가 윤정화님, 촬영 김성미님)은 방송에서

다 보여주지 못한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영화를 통하여 보여주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작품을 준비하였으며, 아나운서 이금희씨가 내레이션을 맡아

방송과는 또 다른 새롭고 특별한 감동을 선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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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임시 진료소에서 어린이 환자를 진찰하는 이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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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료소 마당에 누워있는 콜레라 환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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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환자들에게 신발을 신겨주고 나서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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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 주민들을 진료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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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 주민들이 손수 지은 마멜 공소에서의 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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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당에서 기도하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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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고나무 아래에서 드리는 성탄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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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탄미사를 집전하고 있는 이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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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아래에서 고해성사를 주고있는 이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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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교아이들의 수업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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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당안 야간 자습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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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빗 속에서 분교아이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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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교 아이들의 점심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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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료 대기실에서 한참 연습중인 브라스 밴드부 단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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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스 밴드부 단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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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쿵후 영화를 접해 보아서 그런지 아이들은 사진기를 들이대면 이렇게 쿵후 포즈를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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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돈 보스코 초등학교 아이들. 

            ‘수단의 슈바이처신부’ 


지금부터 한 달 전에 11시 순례미사를 드리고 있는데
미사가 한 20분 정도 지났을 때, 저 뒤에 문이 열리면서
병색이 완연한 로만 칼라를 한 사제가 들어왔어요.
 
머리에는 털모자를 쓰고 있었고, 배가 복수로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조용히 제대 위로 올라왔는데 미사 시간 내내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어요.
 
처음에 누군지도 몰라서 미사 끝나고 제의실에 가서
“어떻게 오셨습니까? 몸이 많이 안 좋으신 것 같네요.”
 
그 신부님이 자신을 소개하는데 자신은 의과대학 졸업하고
살레시오 수도회에 들어가서 로마에서 2000년에 사제서품을 받고
 
수단으로 가서 8년 동안 의사와 사목자를 같이 하다가 8년 만에
휴가를 내서 한국에 돌아왔는데 돌아올 때부터 피를 쏟았대요.
 
‘내가 콜레라에 걸렸나보다!’
와서 검사를 해보니까 온몸이 말기암이더래요.
 
8년 동안 매일같이 하루에 3~400명의 환자를 돌보았대요.
기를 다 빼앗긴 거예요. 아시다시피 수단은 내전이 심한 곳이에요.
 
야외에서 미사 할 때 로켓트가 수십 발이 막 날아온대요.
에이즈가 많은 나라에요.
그 나라는 에이즈에 걸리면 특별히 구호물자를 더 준대요.
 
어느 날, 엄마가 딸을 데리고 와서
“우리 딸이 에이즈 걸린 것 같으니 검사 좀 해 주세요.”
검사를 해 보니까 에이즈가 아니라 나쁜 피부병이었대요.
 
그런데 에이즈가 아니라고 하니까 좋아하는 게 아니라 울더래요.
‘내 딸이 에이즈에만 걸리면 구호물자를 더 탈 수 있는데....’
 
그런 나라가 바로 수단이었어요.
거기서 그 젊은 신부님은 의사로, 주말에는 사제로 살았대요.
 
음악을 잘해서 그 수단 사람들 밴드를 조직해서 미사때 같이 노래 부르고,
“아빠! 아빠...” 소리를 들으며 8년 동안 기를 다 빼다가 병이 든 거예요.
그 신부님 하는 소리가
 
“신부님의 테입을 수단에서도 들었습니다.
그 테입을 번역을 해서 수단 사람들에게
나름대로 신부님의 강론을 많이 전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가면 신부님을 꼭 뵙고 싶었고,
신부님 계신 성지에 오고 싶었는데 이렇게 병이 들어왔습니다.“
 
그 신부님이 다음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저는 그 말을 읽었어요
'신부님, 저 좀 살려주세요... 여기 오면 살 것 같아서 왔어요'
 
신부님을 모시고 온 신부님의 누님들은 뒤에서 엉엉 울면서
“신부님, 우리 신부님 좀 살려주세요...지금 죽기는 너무 아까워요.
 
제 동생 신부님 좀 살려주세요.”
마흔 여덟 밖에 안 되었으니까~
 
그 신부님 머리와 배에 손을 얹고 기도하면서 저는 즉시 느꼈어요.
‘아, 이 사람은 살 사제가 아니다!..성모님이 마지막으로 죽음을
준비시키려고 엄마 집으로 부르셨구나!’
 
그 느낌과 확신이 왔지만 저는 그 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그 신부님에게 예수님의 눈처럼 눈으로만 이야기했어요.
 
'죽음 준비를 시키려고 당신을 부른 것 같소!‘
내 무언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그 신부님은 제 눈을 보고 눈물을 주루룩~ 흘렸어요.
“저 신부님 봤으니 되었습니다.”
 
“기력이 된다면 한 번 더 오세요.”
부축을 해 주고...그 신부님은 떠나갔어요.
 
눈이 많이 오던 날 사무실을 통해서 연락이 왔는데
신부님이 여기를 너무나 오고 싶어 하시는데 복수가 차서
 
도저히 올 수가 없으니 신부님께서 한 번만 와 주시면 안 되겠냐고~
그때는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시간이 되면 한 번 꼭 가보아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인터넷 카페에 들어 가보니 
‘이태석 사제 선종’ 이란 기사를 보고
‘아, 내가 한 발 늦었구나!’
 
그분이 아프리카에서 활동하던 이야기가 쫘~악 나왔는데
성인처럼 정말 훌륭하게 비록 8년 밖에 사제생활을 못 했지만
 
수단의 불쌍한 사람들과 같이 예수님이 되어서 산 모습을 보니까
너무 존경스러운 거예요.
 
저는 밤 10시가 넘어서 빈소를 찾아갔어요.
도착하니까 밤 12시가 다 되었는데 다음 날 장례미사를 준비하느라고
빈소는 이미 치워지고 신부님은 작은 방에 제의를 입혀 뉘어놓았어요.
 
여기 올 때와 똑같이 털모자를 쓰고, 제의를 입고, 얼굴은 새카매가지고
뼈와 가죽만 남아있었는데 얼굴은 편안해 보였어요.
 
저는 그 신부님 곁에 가서 돌처럼 차디찬 머리에 손을 대고
'신부님 내가 왔소, 살아 있을 때 못 와서 미안하오!
 
당신이 산 8년은 다른 사제의 50년보다 더 뜨겁게 살았소,
순서로 따지면 신부생활 30년을 한 내가 먼저 가야하는데...
 
아마 지금쯤 예수님 성모님 만나고 성모님 주치의로 계실 테니 부럽소..
나도 언젠가는 따라 갈 테니 가서 내 이야기 좀 전해 주구료.'
 
강복을 주고 돌아오면서 차를 몰고 캄캄한 밤을 헤치고 오는 그 밤은 갈 때는
정말 마음이 슬펐지만 올 때는 부활에 대한 희망으로 벅차서 돌아올 수가 있었지요.
 
  - 신부님 강론중에서 -
 
 
 
지난 2월의 마지막 날,
아프리카 한복판 수단의 남쪽 작은 마을.
 
남 수단에 하나밖에 없는 브라스 밴드가 마을을 행진했다.
선두에 선 흑인 소년들은 한 남자의 사진을 들고 있었다.
영정 사진이라고 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속 주인공은 한국인이다.
마을 사람들은 사진 속 주인공이 자신들의 아버지라며 눈물로 그를 보냈다.

그들은 전 세계에서 키가 가장 큰 종족, 딩카족이다.
유목민인 그들은 가족과 소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다.
 
용맹함의 상징으로 아랫니 세 개를 뽑고
이마에는 칼로 브이(V)자 모양의 상처를 낸다.
북수단과 남수단의 오랜 내전은 분노와 증오만을 남겼다.

눈물을 보이는 것은 딩카족에게 가장 큰 수치다.
바로 그들이 운 것이다.
 
그곳에서 함께 생활해온 이탈리아 사제도 처음 보는 모습이라며 놀라워했다.
검은 눈물의 배웅을 받으며 이 세상 마지막 길을 떠난 사람,
마흔 여덟 살의 짧은 생을 마감한 故 이태석 신부다.

 
인간이 인간에게 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준 한 남자의 이야기다.
 
톤즈로 가는 길, 그 위험한 여정 2박 3일 
이태석 신부는 2008년 10월 휴가차 한국에 들렀다가 말기 대장암을 발견했다.
투병 끝에 결국 지난 1월 14일 선종했다.

투병 중에도 톤즈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이태석 신부의 투병당시 화면과 사진을 들고 톤즈로 떠났다. 
톤즈로 향한 것은 지난 2월 22일. 그러나, 그날 새벽 아프리카 현지에서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톤즈 부근에서 총격전이 벌어져 20여명이 죽었고,
길은 봉쇄됐었으며, UN에서 외국인들을 내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지역에서는 지난 1월 7일에도 부족 간의 전쟁으로 140명이 희생된 바 있다.  

 
비행기를 2번 갈아타고 흙길을 달려 드디어 톤즈에 입성했다.
서울을 떠난 지 2박 3일만이었다.
 
세상의 가장 가난한 곳을 찾아 떠난 의사.
 이태석 신부는 물질적인 풍요와 성공을 보장받는 의사를 버리고 사제가 됐다.
 
그는 10남매 중 아홉 번째였다. 노모와 형제들이 눈물로 잡았지만,
그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곳을 찾아 떠났다.
 
그곳이 아프리카 수단 남부 톤즈였다. 아랍계가 지배하는 북수단과 원주민이 사는
남수단은 (83년)부터 내전을 벌여왔고, 20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한번에 30만 명이 희생된 인류 최대의 비극 다르푸르 사태도 2003년 이 땅에서
일어났다. 그중에서도 와랍주 톤즈는 내전의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곳이다.  

긴급 구호 전문가인 한비야씨도 자신이 가본 곳 중 가장 최악이라고 했다.
이 신부는 2001년 톤즈에 정착했다. 그는 왜 이곳을 찾은 것일까? 
톤즈를 방문한 적이 있는 지인들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이 찍은 동영상을 모았다.
화면 속의 그는 불빛도 없는 움막 진료실에서 밤낮으로 환자를 돌보고 있었다.
 
초기 화면(2003년)과 2007년 화면을 비교해보면,
그가 이곳을 얼마나 변화시켰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신부님의 죽음을 믿을 수 없다” 
이태석 신부가 떠난 빈자리는 참으로 커 보였다.
 
환자로 북적이던 진료실은 텅 비어 있었고 수술실 침대는 어지럽게 널려 있다.
여기저기서 구해온 약들로 꽉 차있던 약 보관실은 빈자리가 적지 않았다.
 
주민들은 지금도 빈 병원을 찾아와 이신부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병원을 찾은 2명의 중년 여성은 신부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고 통곡했다.
대부분의 톤즈 사람들은 신부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고 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한센병(나병) 환자들이다.
이 신부는 그들이 모여 살 수 있는 마을을 만들어주고 아침저녁으로 들러
세심하게 살폈다.  한센병 환자들에게 신부의 사진을 나눠주었다.
 
 
그들은 손가락이 없어진 뭉툭한 손으로
사진 속 이신부의 얼굴을 쓰다듬고,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흙집 창가에 사진을 올려놓고 세상에서 가장 경건한
기도를 올렸다. 그들은 이태석 신부가 이 세상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자신들에게 해주었다고 했다.
 
“총” 대신 “악기”를 든 아이들, 이유 있는 눈물 
이태석 신부는 전쟁으로 몸도 마음도 가난해진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아이들과 함께 톤즈강의 모래를 퍼다 날라 학교를 지었다.
 
폭격으로 부서진 건물 기둥을 옮겨와 농구대도 만들었다.
내전에 소년병으로 끌려가는 아이들을 학교로 불러들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그리고, 2005년 놀라운 계획을 실행한다.
 
35인조 브라스밴드를 만든 것이다.

한국에서 트럼펫, 클라리넷등 악기를 구해오고, 반듯한 단복도 마련해 입혔다.
스스로 악기 연주법을 공부해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음악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들은 어른들의 ‘총’과 ‘칼’을 녹여서
‘악기’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브라스 밴드는 그가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희망의 상징이었다.
밴드 부원들은 신부에게 배운 것을 후배들에게 가르치며
자기들끼리 밴드를 꾸려가고 있었다.
 
그들은 이 신부의 마지막 투병 화면을 지켜보며 펑펑 울었다.
눈물을 멈춘 아이들은 이 신부와의
아주 특별한 마지막 이별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故 이태석 신부,
이태석 신부에 대해 물으면,
그들은 한결같이 눈물부터 보였습니다.

 
의사 선배는 그의 병을 고쳐주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며 목이 메었고,
올해 일흔의 이탈리아 사제는 자신을 데려가고 대신 할 일 많은
이 신부의 생명을 살려달라 기도했었다며 울먹였습니다.

톤즈에서 만난 13살 소년은
이태석 신부에게 마지막 인사를 해보라고 하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어깨를 심하게 들썩였습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현지 통역도
아이의 손을 잡고 위로하며 따라 울었습니다. 
 
눈물을 피할 길이 없어
서둘러 그 자리를 빠져나와야 했습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눈물로 기억하는 것일까?


 
이태석 신부의 삶을 통해
사랑과 희생과 나눔의 정신을..........  8월을 보내며..... 
 
사랑과 나눔의 "이태석 신부님
 
9월에 개봉하는 영화 한편을...  

  

청연/편집(장기도*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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