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봄비답지 않게 꽤 많은 비가 내렸다. 마침 한가하던차에 국립과천과학관에서 열리는 "신비의 파라오 투탕카멘"을 보러갔다.
조선일보 애독자를 위한 초청에 운좋게 당첨이 되었다. 9세에 왕위에 올라 18세에 죽은 투탕카멘에게는 안됐지만 정말 미이라로 지금까지 보관되었고 그 무덤에서 3000년전에 체스라던다 게임기가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앞으로 관악산, 뒤로는 청계산 망경대에는 겨울처럼 하얀 눈이 쌓여 마치 희말라야 설산을 멀리서 보는듯했다. 일일이 다 설명할 수 없어 아래에 학습자료로 보내준 것을 일부 요약하였다.
1. 이집트 문명과 세계 4대 문명
이집트는 중국, 인도, 메소포타미아와 함께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로 널리 알려져 있습
니다. 세계 4대 문명은 모두 강을 낀 비옥한 지역에서 시작됐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
요. 이집트 또한 정기적인 나일 강의 범람으로 땅이 기름져 일찍부터 문명의 싹이 움텄
습니다. 그래서 이집트 문명을 ‘나일 강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이집트는 기원전 4000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6000년 전에 이미 나라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상이집트(남부 이집트)와 하이집트(북부 이집트)로 분리되
어 있었는데 기원전 3100년 쯤 한 왕이 이 두 땅을 통일하면서 이집트 역사가 시작됐습
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건국신화인 단군신화에 따르면,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것이 기원
전 2333년이므로 이보다도 1000년 가량 앞선 일입니다.
투탕카멘은 기원전 1334년 경 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가 9년 만에 죽은 비운의
‘소년 파라오’입니다. 따라서 그의 무덤에서 나온 유물들은 적어도 지금으로부터 3300년 전
쯤에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2. 파라오는 누구인가
‘파라오‘라는 말은 이집트어로 ’위대한 집‘ 이란 뜻입니다. 이처럼 처음에는 왕이 거처하
는 궁정을 뜻했지만, 점차 왕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 됐지요. 고대 이집트에서 파라오는
신과 동일하게 여겨졌으며 나라와 백성들을 다스리는 절대 군주였습니다. 파라오는 정
치적으로 나라의 질서를 유지하는 책임을 지는 동시에, 종교적 지도자로서 죽은 후에는
사후세계에서 백성들의 안녕을 돌봤습니다.
이집트인들은 파라오가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땅을 떠나는 것일 뿐, 그
가 존재했던 하늘로 가서 창조주와 만나고, 영혼은 하늘을 항해하다 별이 됨으로써 우주
속에서, 계속해서 인간들의 운명을 인도한다고 믿었지요. 죽은 파라오의 육체는 미라로
만들어지고, 지상에 머무는 동안 자신이 준비한 영원의 거처인 무덤에 안장됩니다. 파라
오는 죽은 것이 아니라 삶을 다른 방식으로 계속하는 것일 뿐이지요.
백성들은 불안과 근심 속에서 세상의 혼돈에 종지부를 찍어줄 후계자를 초초하게 기다
리며 왕의 장례를 치릅니다. 이어 후계자의 대관식이 열립니다. 대관식의 하이라이트는
옥좌에 올라 왕관을 쓰는 것입니다. 왕은 하이집트를 상징하는 붉은 왕관과 상이집트를
상징하는 흰색 왕관, 즉 두 개의 왕관을 받았습니다. 두 왕관을 겹쳐 씀으로써 상-하 이
집트의 지배자임을 나타냈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파라오는 모두 185명 정도입니다. 기원전 3100년 경에 시작되어 기원
전 343년 마지막 이집트 출신 파라오가 죽기까지 3000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 동안 이집
트를 다스렸습니다. 이 기간을 보통 30개 왕조로 나누는데, 투탕카멘은 전성기인 제 18
왕조에 속하는 파라오입니다. 마지막 파라오 뒤로는 페르시아 왕조가 이어졌으며, 이어
그리스계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지배하다가 기원전 30년에 클레오파트라의 자살로
막을 내립니다.
3. 고대 7대 불가사의
우리가 흔히 ‘고대 7대 불가사의’를 말하는데, 이 중 2개가 이집트의 것입니다. 이집트
문명이 얼마나 찬란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지요. 그 중 하나가 피라미드,
다른 하나가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입니다. 피라미드는 지금도 남아 웅장한 모습
을 자랑하고 있지만 파로스 등대는 오랜 세월과 끈질긴 물살에 깎여 아쉽게도 지금은 사
라지고 없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피라미드는 파라오의 무덤입니다.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건축물이지요. 고대 이집트 왕국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피라미드는
카이로 서쪽 기자의 모래사막에 건설된 것들이 유명합니다. 맞은편에는 저 유명한 스핑
크스가 있지요. 모두 3개가 있는데, 그중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것이 쿠푸의 피라미
드이며, 다음이 카프라의 피라미드, 그 다음이 멘카우라 피라미드입니다.
쿠푸의 피라미드에는 총 250만개의 돌덩어리가 사용됐는데, 그 중 일부는 무게가 150톤
까지 나가며, 모든 돌덩어리의 평균무게는 2.5톤에 이릅니다. 그 돌들이 4만6500제곱
미터의 땅을 덮고서 약 140미터 높이로 솟아올라 있습니다.
왕의 유해가 놓인 곳까지 가는 비밀통로를 만들기 위해 돌덩어리 몇 개가 빠져 있는 것
을 제외하면 피라미드는 속도 꽉 차 있습니다. 방문객들은 가이드를 따라 두 손 두 발로
기다시피 동굴 같은 그 웅장한 무덤 속으로 들어갑니다. 천장이 낮아 허리를 잔뜩 구부
린 채 계단을 한참 올라가면 피라미드의 심장부가 나옵니다. 이 곳에는 한때 쿠푸 왕과
왕비의 유골이 어둠과 비밀에 묻힌 채 안식을 취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파라오의
대리석 석관만이 망가진 채 텅 비어 있습니다.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대략 기원전 1500년 경부터 룩소르 맞은편에 위치한 ‘왕들의 계
곡’에 묻히기 시작했습니다. 이곳에서 지금까지 65개의 파라오 무덤이 발굴됐는데, 이
중 투탕카멘을 제외한 나머지 무덤들은 모두 도굴됐습니다. 투탕카멘은 사실 무덤이 발
견되기 전까지만 해도 별로 알려진 것이 없는 미미한 존재였습니다. 그런 그의 무덤에서
황금마스크를 비롯한 보물들이 쏟아져 나오자 사람들은 ‘그렇다면 저 유명한 람세스 2세
의 무덤에는 과연 얼마나 많은 보물들이 들어있었을까’ 추측하곤 했습니다.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나온 보물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이 황금 속관과 황금 마스크입니
다. 러시아의 마트로시카 인형처럼 관 속에 또 다른 관이 들어있는 형태로 이루어진 투
탕카멘의 관 가운데 제일 안쪽 관이 순금 관입니다. 이 순금 관 안에 투탕카멘의 미라
가 들어있었고 그 얼굴에 황금마스크가 씌어져 있었지요. 황금관은 110.4킬로그램의 순
금으로 이루어졌으며, 황금마스크 또한 11킬로그램이나 됩니다. 실로 엄청난 금이 아닐
수 없습니다.
4. 하워드 카터와 고고학
투탕카멘 무덤의 발굴은 고고학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 중 하나일 것입니다. 아마
하인리히 슐리만의 트로이 유적 발견과 진시황의 병마용 발굴 정도만이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겁니다. 1922년 하워드 카터가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견했을 때 고고학계는
물론, 전 세계가 흥분에 휩싸였습니다. 하워드 카터가 오랜 작업 끝에 투탕카멘의 무덤
을 발견하고, 이어 3300년 동안 잠들어 있던 무덤을 마침내 개봉하던 순간을 함께 생각
해봅시다. 하워드 카터는 그 순간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문 상단 오른쪽 구석에 조그만 구멍을 냈다. 안에서 새나오는 더운
공기 때문에 촛불이 펄럭거려 처음에 나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이윽고 내 눈
이 그 빛에 익숙해지면서 안에 있던 물건들이 안개 속에서 서서히 떠올랐다. 이상한 동
물들, 조각상들, 금붙이들이. 실내의 도처에서 황금빛이 번쩍거렸다. 카나번 경이 걱정
스러운 소리로 물었다. ‘뭐가 보여요?’ 나는 그저 ‘예, 놀라운 것들이.(Yes, wonderful
things.)’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
하워드 카터가 위대한 것은 단순히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견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
는 무덤에서 발견된 유물들을 모두 수습해 처리하고 카이로로 반출하기까지 거의 10년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집트 당국의 방해와 무능, 사막의 무더위, 몰려드는 방문객, 참을
성 없는 언론 등 갖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자신의 원칙에 충실했지요. 발
굴부터 처리, 반출까지 모든 일을 체계적으로 처리했으며, 모든 것을 단계별로 정확히
기록했습니다. 공식적으로 기록된 5398점의 유물들마다 번호를 부여했으며, 현장에서
발견된 상태 그대로 사진을 찍고 일일이 간단한 설명을 붙였습니다. 나중에 자신이 발견
한 유물들을 연구할 후학들을 위해, 아니 그보다도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보존해야
한다는 사명감 없이는 불가능했을 작업이었습니다.
우리나라 무령왕릉의 발굴과정을 이와 비교해보면 그 차이점이 뚜렷이 부각됩니다. 무
령왕릉은 지난 1971년 충남 공주 능산리에 있는 백제무덤 군에서 인부들이 배수로 공사
를 하던 중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아무도 손대지 않은 거의 완전한 상태로 발견된 무덤
으로, 투탕카멘의 무덤처럼 우리나라 고고학사상 매우 중요한 발견 중 하나로 꼽힙니다.
묻힌 사람의 신원과 조성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삼국시대 무덤이었지요. 그런데
이 무덤을 발굴해 유물을 수습하는 데 불과 하루가 걸렸습니다. 하룻밤 밤샘 작업으로
끝낸 당시 발굴 작업은 두고두고 한국 고고학계의 수치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하워드 카
터가 10년 걸려 한 일을 우리는 하루 만에 해치운 것입니다. 물론 지금 돌아 보면 ‘호랑
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창피한 일이 아닐 수 없
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워드 카터의 투탕카멘 무덤 발굴 스토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가 많습니다.
5. 이집트의 신들
이집트에서는 만물이 종교적 대상이었습니다. 토테미즘부터 신학에 이르기까지 종교의
온갖 단계와 양식이 나타납니다. 고대 이집트 신화에는 수천 명이 넘는 다양한 신이 존
재하지요. 이집트의 신들 가운데 단연 으뜸은 태양이었습니다. 태양은 때때로 최고신 라
(Ra), 혹은 레(Re)로 숭배 받았지요. 태양은 호루스 신이기도 했습니다. 매의 우아한 자
태를 한 이 신은 매일 장엄한 모습으로 하늘을 가로질러 날았습니다. 이집트 종교와 왕
족을 나타낼 때 거듭 등장하는 상징 중 하나가 바로 매의 모습을 한 호루스 신입니다.
이집트인들은 생명을 가진 것은 거의 모두 숭배했습니다. 그중에서도 동물이 인기가 많
았지요. 이집트인들이 숭배한 동물은 지역과 시기에 따라 황소•악어•매•암소•거위,
염소•양• 고양이•자칼•뱀 등 다양했습니다.
6.투탕카멘은 누구인가
투탕카멘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것은 1922년 하워드 카터가 그의 무덤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그는 제 18왕조 후기의 잘 알려지지 않은 수수께끼 같은
왕이었지요. 사실 투탕카멘의 부모가 누구냐 하는 것도 아직 분명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
입니다.
왕자 ‘투탕카텐’은 왕위에 오른 지 2년 만에 이름을 ‘투탕카멘’으로 바꿉니다. 동시에 수
도를 아마르나에서 멤피스(테베)로 옮깁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투탕카멘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아케나텐은 왕이 되면서 종전에 숭배하던 아멘 신을 버
리고 아텐 신만을 믿도록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그리고 수도를 아마르나로 옮겼지요. 투
탕‘카멘’(아멘 신의 살아있는 이미지)의 본래 이름이 투탕‘카텐’(아텐 신의 살아있는 이미
지)이었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투탕카멘이 이름을 바꾸고 수도를 옮긴 것은 아케나텐과
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투탕카멘은 아홉살에 왕이 됐습니다. 소년 파라오는 행정 지도자인 아이와 군부 지도자
인 호렘헵의 직접적인 보살핌을 받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투탕카멘은 아케나텐의 딸 안
케세나멘과 결혼했는데, 그녀는 투탕카멘보다 나이가 많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투탕
카멘의 치세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몇 차례에 걸친 군사원
정이 있었던 것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그가 실제로 전쟁에 참여했는지는 의문입니다.
투탕카멘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1925년 11월 투탕카
멘에 대한 첫 부검이 실시됐는데, 이 때 비로소 그가 18세 쯤에 사망한 것 같다는 결과
가 나왔습니다. 투탕카멘이 젊은 나이에 갑자기 사망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갖가지 음
모론이 활발히 제기되기 시작했지요. 1968년과 1978년, 투탕카멘의 미라를 대상으로
두 차례 실시된 엑스레이 검사 결과, 후두부의 상처에서 강한 타격 때문으로 보이는 부
서진 뼈 조각이 발견됐습니다. 그 이후로 왕이 암살됐다는 음모론은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됐지요. 혼란기였던 제 18왕조 말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할 때 투탕카멘의 암살 가능성은
부인할 수 없는 게 사실입니다.
투탕카멘의 미라는 2005년 컴퓨터 단층촬영이라는 첨단기술을 사용해 마지막 검사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검사결과는 끝내 투탕카멘의 두개골 부상을 속 시원히 밝혀내지 못
했습니다. 결국 투탕카멘의 암살 음모설은 설로만 그쳤을 뿐 결정적 증거 없이 설득력을
잃고 만 것입니다.
7. 파라오의 저주
고대 이집트인들의 마술에 대한 믿음은 늘 유럽인들에게 매혹의 대상이었습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부터 중세, 르네상스, 근대에 이르기까지 나일강변의 땅은 모든 초자연적인
지혜와 지식의 원천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지요. 이집트의 파라오들이 자신의 무덤을
외부침입자로부터 영원히 보호하기 위해 주술(呪術)을 사용해왔다는 생각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생각은 수천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유효한 데, ‘파라오의 저주’라는 현대의 전설이 바
로 그것입니다. 특히 투탕카멘의 무덤이 발굴된 이후로는 이 같은 미신이 극에 달했는
데, 도굴꾼은 물론 고고학자들도 ‘무분별한 행동’을 할 경우 초자연적인 존재에 의해 보
복을 당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돌았습니다.
하워드 카터의 재정적 후원자인 카나번 경의 갑작스런 죽음은 이 같은 신화에 불을 댕겼
습니다. 그는 1923년 4월5일 투탕카멘의 미라와 석관을 보지도 못한 채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죽은 시각, 카이로에서는 알 수 없는 전기고장이 발생했지요. 뒤 이어
몇 달 사이 카나번 경의 이복형제, 간호사, 미라 엑스선 촬영을 담당한 의사, 무덤을 방
문했던 미군이 잇달아 사망했지요. 그 외 여러 학자들과 방문객들이 사망했습니다.
언론에 의해 소문은 빠르게 번져나갔습니다. 저주, 흉조, 신비의 세균이 ‘두 번째’, ‘일곱
번째’, ‘아홉번 째’ 희생자를 죽음으로 몰아갔으며, 결국은 20명도 넘는 사람이 투탕카멘
의 제물이 됐다는 소문이 나돌았습니다. 심지어 카터가 기르던 카나리아가 코브라에 잡
아먹힌 사실, 카나번 경이 죽었을 때 카이로에서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사실 등도 ‘파라
오의 저주’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돌았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발굴자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져 나가자 하워드 카터 입장에서도 터
무니없는 이야기라며 적극 반박하지 않을 수 없는 단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는 한마
디로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이라며, 무덤 안에 독소 같은 것은 없다는 과학적 증거가 있
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또 고대 이집트 어느 시기에나 저주와 경고문구가 새겨진 비문
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사자(死者)에 대한 경의를 유도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
다. 특히 그 경고는 주로 무덤의 평화를 깨고 부장품을 도둑질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
쉬운 무덤의 일꾼들을 겨냥한 것이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8. 상형문자와 이집트의 재발견
과거 중세시대 때 유럽인들은 이집트를 로마의 식민지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문명이 그리스와 함께 시작된 줄 알았지요. 중국이나 인도에 대해서는 알만큼
알아도 정작 이집트에 대해서는 피라미드 말고는 아는 게 별로 없었습니다.
이처럼 잊혀졌던 이집트를 재발견하는 데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략
이 계기가 됐습니다. 나폴레옹은 1798년 프랑스 원정군을 이끌고 이집트로 가면서 화가
와 기술자, 학자들을 대동해 이집트의 지형을 탐사하고 지도를 제작하도록 했습니다. 룩
소르 신전이나 카르낙 신전의 모습을 세계에 처음 알린 것도 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이 프
랑스 한림원에 제출하려고 꼼꼼히 작성한 이집트지(誌)는 기억에서 사라진 이집트 문명
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이정표가 되었지요.
하지만 오랜동안 신전이나 비문에 기록되어 있는 상형문자들은 해독이 불가능했습니다.
이집트 상형문자는 기원전 3000년 경부터 돌에 새겨진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합
니다. 상형문자(hieroglyphics)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신성한 새김’이라는 의미를 지니
고 있는데, 약 700개~2400개 정도의 글자가 존재합니다. 당시 이집트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맹이었기 때문에 글자를 쓸 줄 아는 사람은 매우 높은 대접을 받았답니다.
이집트에서 파라오의 시대가 끝나며 상형문자는 역사 속에서 잊혀졌고, 더 이상 해독도
불가능하게 되었죠.
그 해독의 열쇠를 찾은 것이 바로 샹폴리옹이라는 프랑스 학자였습니다. 오랫동안 상형
문자 연구에 매달려온 그는 1799년 나폴레옹 군대가 나일강의 로제타 하구 근처에서 우
연히 발견한 검정색 석판을 연구한 끝에 마침내 이 비문을 해독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
것이 저 유명한 로제타 스톤입니다. 그가 이 비문을 해석할 수 있었던 것은 비문이 세 가
지 언어로 씌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같은 내용을 처음엔 상형문자로, 두번째는 이집
트 민간인들이 쓰던 민용문자, 세 번째는 그리스어로 적어놓은 것입니다. 샹폴리옹은 이
세 언어를 비교함으로써 고대의 작문체계를 알게 됐고, 아울러 상형문자 해독의 길을 열
게 된 것입니다. 한 학자의 20여년에 걸친 집념이 낳은 결실이었습니다. 1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아무도 읽지 못했던 상형문자가 마침내 해독된 것입니다. 이로서 고대 이집트
문화를 이해하는 문이 열리게 됩니다. 역사학 사상 가장 짜릿한 순간 중 하나였지요.
9. 미라 만드는 방법
고대 이집트 사람들에게는 독특한 장례 풍습이 있었는데 바로 ‘미라’를 만드는 것이었습
니다. 시신에는 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어 이를 보존하는 것이 고인의 내세에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미라를 만들어 보존하게 된 것이죠. 투탕카멘 역시 죽은 후 미라로 만들
어졌습니다.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투스는 이집트인들이 시체를 방부 처리하는 기술을 다음과 같
이 생생히 전해주고 있습니다.
미라를 만들 때는 먼저, 쇠갈고리를 코에 넣어 뇌를 제거한 후 나머지 공간에 약물을 주
입합니다. 그리고 날카로운 돌로 옆구리를 째 모든 장기를 빼냅니다. 그리고 복부를 세
척한 뒤 으깬 향신료와 야자주로 배를 헹구어 냅니다. 그리고 난 후 뱃속을 향신료와 몰
약으로 채운 뒤 다시 꿰매놓습니다. 이 후 70일 동안 사체를 천연 탄산소다 속에 담가
놓아 방부 처리를 합니다. 70일 후 사체를 꺼내어 씻고 고무풀을 발라 아마포 붕대로 감
쌉니다.
이집트인들은 죽은 왕이 사후에도 삶을 계속 영위하기 위해서는 내장을 잘 보관하는 것
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따라 왕의 내장을 네 개의 단지에 넣어 무덤 속에 보
관했지요. 이것을 카노포스 함이라고 하는데, 안을 네 칸으로 나눠 폐와 비장, 간, 창자
등 네 개의 중요한 장기를 보관했습니다. 카노포스 함에는 이 장기들을 지킬 네 명의 수
호신을 새겨 놓았습니다.
투탕카멘의 경우, 설화석고로 만든 카노포스 함 속에 내장을 담은 아름다운 황금 용기가
들어있었지요. 이 함 위로 사당 모양의 궤가 덮여 있고, 여신들이 이 궤를 네 방향에서
둘러싸고 있습니다. 이 유물들을 출입구의 이동식 사당에 웅크리고 있는 아누비스가 지
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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