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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은래의 六無

혜안1952 2012. 8. 27. 10:16

 

주은래의 육무(六無)

 

 

저우언라이(周恩來 : 1898~1976)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가, 혁명가, 정치 지도자이며, 사회주의 운동가입니다.

장쑤성 화이안에서 태어났으며.

톈진 난카이 대학교를 거쳐 일본 와세다 대학교,

메이지 대학교 등에서 유학하였다고 합니다.

미국의 작가 헤밍웨이의 부인 마사 겔흔은 저우언라이를

“중국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은 바로 저우언라이다.

저우언라이는 우리가 중국에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 유일하게 좋은 사람이었다.

중국 공산당원들이 모두 그와 같다면 중국의 미래는

분명히 그들의 것이 될 것이다.” 라는 평을 했습니다.

 

 

그 주은래의 인물됨을 나타내는 몇 가지 일화가 있어 알아봅니다.

닉슨이 중국으로 와서 저우언라이와 같이 탁구 경기를 보는데,

갑자기 자리를 빠져나갔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어디 다녀왔는가?”

“내일 당신이 만리장성을 가신다고 하니,

그쪽의 눈을 미리 치워놓도록 조치하고 왔습니다.”

이렇게 주밀한 저우언라이가 사망했을때 남긴 유산은 겨우 70만원이었다고 합니다 .

 우리한국의 역대 대통령 각하와 님들!

그리고 그가족과 주변인물들의 재산과 유산을  비교 비유 해보시면 어떤결과 로 보여질까요 ?

 기억하고 싶지 않습니다

<정의롭고 배려심이 넓고 덕망이 있으며,

물처럼 그늘진곳과  밝은곳을 가리지않고 야욕없이 삶을  살면서,

국민과 나라에 도움이되며 ---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 이시대 우리조국의 지도자상이 아닐까요?  

말보다는 실행을! 어제 보다는 오늘이 !

그리고 아름다운 내일의 값진 선물을 함께하는 맑고 정직한 지도자를   기대해봅니다 >

 

 

 

생전에 마오쩌둥(毛澤東)도 “주은래는 사리사욕이 전혀 없고,

고상하고 순수하며, 도덕적인 사람이고,

또 인민해방을 위해 자신을 완전히 헌신한 사람”이라고 평가를 했습니다.

그 중 우리를 감동시키는 일화는 1946년 공산당 중앙위원들이

비행기를 타고 옌안에서 충칭으로 갈 때의 일입니다.

갑자기 기장이 “날개가 결빙이 생겨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모두 낙하산을 매시오!” 전부 낙하산을 매었습니다.

그런데 한 소녀가 낙하산이 없는 것입니다.

때 주은래는 자신의 낙하산을 벗어 소녀에게 건네주었습니다.

다행스럽게 사고는 나지 않았지만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요즘 우리나라에도 대선(大選)을 몇 개월 앞두고 서로 대권(大權)을 차지하고져 갖가지의

흑색선전으로  선거분위가 날로  혼탁해져 가는 것 같이 보여집니다.

이럴때일수록  '주은래'와 같은 정치지도자가  나타났으면, - 하는 아쉬움과 바램이  많습니다.

우리도 이제는 위대한 지도자를 발굴 선정해서 나랏일을 마음놓고 맏

겼으면, 하는 바람에서 

‘주은래의 육무(六無)’를 다시한번 읽어봅니다.

 

 

 

첫째, 사불유회(死不留灰)입니다.

 

죽어서 유골을 남기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주은래가 사망한 시점은 역사의 격변기였습니다.

임표(林彪) 집단이 막 숙청되고,

강청(江靑)의 사인방(四人幇)이 여전히 세력을 떨치고 있을 때였습니다.

1976년 1월 주은래가 사망하였다는 소식과 슬픈 음악이 라디오에 흘러나왔습니다.

그리고 TV로 간략한 고별의식이 방송되었는데.

 이 때 강청은 모자도 벗지 않고 고개를 숙여 뭇중국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고, 합니다.

 

 

며칠후 팔보산(八寶山)에서 화장이 있었습니다.

 추도회<1월 15일>가 끝난 후, 부인 등영초는 '생전에 유골을 남기지 말고

대지에 뿌리라고 하였다'는 유언 얘기를 전했습니다.

'주은래의 유골'을 '그가 대학을 다니며 혁명을 시작했던 천진에서

황하입구까지' 농업용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뿌렸다고 합니다.

유골이 없으므로,  묻은 장소나 비석도 당연히 없다고 전해져 옵니다.

 

 

 

둘째, 생이무후(生而無後)입니다.

 

살아서 후손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중국인의 관습에는 후손을 이어가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누구의 후예라는 것은 생활에서 매우 큰 의미가 있습니다.

불효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후손을 두지 않는 것이라  합니다.

후손들이 선인을 기리는 것에는 첫째, 고거(故居, 거주하던 집), 둘째, 묘지, 셋째, 후손인데,

그 중에서 후손이 가장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은래는 혁명과정에서 희생된 열사들의

자손들을 보살피고(총리를 지낸 이붕은 주은래의 양자임),

자신은 후손을 두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셋째, 관이무형(官而無型)입니다.

 

관직에 있었지만 드러내지 않는 것입니다.

수 천 년 이래로 관직은 권력과 연결되어 있었고,

관직이 높을수록 특수한 대우를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주은래는 외교, 공무를 수행할 때는 관리였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보통의 사람들과 같은 생활이었습니다.

 중국유사이래 그는처음 있는 평민재상이었다고 합니다.

 

 

 

넷째, 당이무사(黨而無私)입니다.

 

당에 있으면서도 사사로움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레닌은  '사람은 계급으로 나누어지고, 계급은 정당이 영도하며,

정당은 영수가 주재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있으면 당은 있게 마련이죠.

정당 외에 붕당, 향당 등의 사당이 있는 것입니다.

모택동 주석도 일찍이 당 외에 또 당이 있으며,

당내에도 파벌이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서로 좋아하는 사람끼리 당을 이루고, 이익이 맞는 사람끼리 당을 이루며,

당을 이룬 뒤에는 사익을 취합니다.

그리고 권력을 취하고 영화를 취하는 도구로 쓰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주은래는 당내에 파벌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당을 이용해 개인의 이익을 취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다섯째, 노이불원(勞而不怨)입니다.

 

고생을 해도 원망하지 않은 것입니다.

주은래는 혁명사업 과 국가건설에 많은 희생과 노력으로 고생을 많이한 사람입니다.

 그는 해방 전에는 상해노동자기의, 팔일기의, 만리장정, 삼대전역, 지하투쟁 등으로,

해방 후에는 정치, 경제, 문화 등의 업무를 수행하면서 헤아릴수없는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죠.

업무량으로만 계산한다면 주은래의 업무량이 당시 당원들 중에서 가장 많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한 마디의 원망도, 불만과 불평하는자태가 없었다 합니다.

 

 

 

여섯째, 사불유언(死不留言)입니다.

 

죽으면서 유언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1976년 주은래가 죽기 전에 모택동도 매일 한 번씩은 주 총리의 병세를 물어보고,

부인도 매일 병석에서 같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혁명원로들은 사인방에 의하여 거의 다 타도되고

유일하게 남은 사람이 섭검영(葉劍英) 원수였습니다.

섭검영은 백지를 비서들에게 주고, 혹시 주은래 총리가

무슨 말씀을 하시면 하나도 빼지 말고 기록해두라고 지시 하였습니다.

결국 사망 후에 다시 받아본 백지는 원래 그대로인 상태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

 


 

주은래라고  '남기고 싶은 말이 없었겠습니까?'

'후일의 분란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주은래는 중국 인민의 가슴 속에 영원한 총리로 남아 있습니다.

경우는 상이하지만, 우리도 이번 대선을 통해서  '대한민국 의 주은래'라는  지도자를 맞이 하고싶습니다 !

임기 5년 동안, 여섯 번이나 사과를 하였습니다.

이젠 불미스럽고 수치스러운 지도자는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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