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

갈릴래아 호숫가를 거닐며

혜안1952 2011. 9. 8. 12:17

오늘 아침 동아일보에 정호승 시인의 새벽편지가 실렸다.

시인은 달랐다. 갈릴래아 호수의 깊이에서 인생의 깊이를 깨닫고

인생의 내면적 깊이에서 깊은 사랑이 있는 영혼의 깊이를 생각했다.

나이는 점점 들어가고 머리가 자꾸 희어지는데

아직도 물질만능주의에 집착하고 있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산정호수는 못가더라도 율동공원 호수라도 한바퀴 돌고와야겠다.

 

 

 

정호승 시인

지난여름 이스라엘 갈릴래아 호수에 가보았다. 우리나라 산정호수 정도 되겠거니 하고 생각했는데 멀리 수평선이 보일 정도로 망망한 바다 같았다. 예수 시대의 작은 고깃배라도 오갈 줄 알았으나 모터보트를 타고 호수 한가운데로 질주하거나 파도를 가르며 윈드서핑을 즐기는 휴양객들이 있는 현대화된 호수였다.

나는 2000여 년 전 예수의 제자인 베드로가 예수한테 수위권(首位權)을 받았다는 ‘베드로 수위권 성당’ 아래 호숫가를 천천히 거닐었다. 갈대가 우거진 호수는 뜨거운 햇살 아래 은빛 물결을 빛내며 고요했다. 바위에 앉아 양말을 벗고 발을 담그자 물은 따스했다. 피라미 같은 물고기들이 내 발밑에서 부산히 움직였다. 문득 이런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예수를 만났을 가난한 어부 베드로의 모습이 떠올랐다. 밤새 물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베드로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고 한 예수의 말을 따르자 ‘그물이 찢어지고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물고기가 많이 잡혔다’는 성서의 이야기도 떠올랐다.

만일 베드로가 예수의 말을 무시하고 깊은 데에 그물을 던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호수 구석구석을 다 아는, 갈릴래아 최고의 어부인 내가 밤새도록 그물을 던져도 못 잡았는데 깊은 데로 그물을 던지라니!’ 하고 못마땅하게 여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어부로서 그는 그날 참으로 애탔을 것이다. 힘이 빠지고 마음이 상해 다시 그물을 던져보라는 예수의 말에 화를 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일 그랬다면 그는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을 것이고, 예수의 제자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누구인지 잘 알지 못하는 예수의 말을 그대로 따랐다.

인생이란 넓이만큼 깊이도 중요

나는 갈릴래아의 푸른 물결을 오랫동안 바라보며 베드로의 이 점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 내 일에 간섭하거나 관여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더구나 내가 잘 아는 분야에 다른 사람이 참견할 경우 화를 낼 수도 있다. 그러나 베드로는 누구보다도 고기를 잘 잡는 어부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남의 권고를 받아들이는 겸손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이는 자기주장만 하고 다른 사람의 말에는 아예 귀를 닫아버리는 이 시대의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자세라고 생각된다. 특히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다른 사람은 다 아니라고 해도 자기만은 옳다고 주장하는 위정자들은 베드로의 이 겸허한 자세를 배울 필요가 있다.

또 물고기를 잡지 못해 가족을 굶길 처지에 놓인, 요즘 식으로 이야기한다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베드로에게 관심을 가진 예수의 태도 또한 중요하다. 우리는 개인주의가 팽배해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남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 누가 길바닥에 쓰러져 있어도 무관심하다. 그러나 예수는 베드로의 일을 자기 일처럼 여기고 참견한다. 예수의 이러한 태도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공동체적 삶의 자세다.
나는 지금까지 예수가 베드로에게 한 말씀이 내게 한 말씀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것은 그 ‘깊은 데’의 의미를 내 인생에 이익이 되도록 이해하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시가 잘 써지지 않거나 창조성이 요구되는 어떤 일이 지지부진할 때 ‘깊은 데로 그물을 던져라. 그래야 큰 고기를 잡지’ 하고 늘 ‘큰 것’이라는 내 외형적 이익을 생각해왔다. 인생을 시작하는 젊은이들에게도 늘 그런 말을 잊지 않았다.

“젊을 때는 인생의 꿈과 목표를 크게 잡아라. 처음부터 깊은 데에 그물을 던져라. 고래가 바닷가에 살지 않듯이 큰 물고기는 얕은 데에 살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인생의 목표는 ‘큰 것’이어야 하고 그것을 잡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깊은 데’에 그물을 던져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인생의 외형적 크기와 물질적 성공에 중점을 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가 말한 그 ‘깊은 데’란 인생의 외형적 목표와 그 규모에 대한 것이 아닐 것이다. 인생의 내면적 깊이, 깊은 사랑과 정의가 있는 영혼의 깊이를 의미할 것이다.

물질적 성공보다 깊은 사랑을…

인생은 상대적 넓이도 중요하지만 절대적 깊이도 중요하다. 인생은 바다이면서도 우물과 같다. 우물이 넓기만 하다면 바다지 우물이 아니다. 우물은 넓이도 중요하지만 결국 깊어야 우물로서의 존재가치가 형성된다. 인생은 넓은 바다가 되기만을 바랄 게 아니라 깊은 영혼의 우물을 지닐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예수는 베드로를 물고기 낚는 물질의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영혼의 어부로 전환시켰다. 물고기가 많이 잡히기만을 바라는 평범한 어부로 하여금 깊은 데에 그물을 던지게 함으로써 인간을 낚을 수 있는 진리의 어부가 되게 했다. 이것은 베드로의 삶의 내면이 더 깊어짐으로써 그 인생의 깊이 또한 더 깊어진 것을 의미한다.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깊은 데’란 어디일까. 가을을 맞아 내 삶의 갈릴래아 호수 그 깊은 데가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정호승 시인

'좋은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중물  (0) 2011.09.23
딱 한 사람  (0) 2011.09.16
동사를 불러오다  (0) 2011.08.27
螢雪之功  (0) 2011.08.25
査頓의 유래  (0) 2011.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