松珉隨筆房

나를 찾아 떠난 동해안 여행

혜안1952 2010. 12. 30. 21:34

    

  나를 찾아 떠난 동해안 여행


                                                                                                                                                                                                                  

  지난해 이만 때쯤 나는 무척 혼란에 빠져있었다. 처음이자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직장을 그만두고 기분이 착잡했다. 평생직장이라고 생각하던 일터가 어느새 정년을 맞고 보니 세월의 무수함을 실감하게 되었다.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아직도 청춘인데 할 일이 없어 밀려난다고 생각하니 무척 허탈감에 빠지게 되었다. 여름 내내 더위에 지쳐 축 늘어져 있다가 찬바람이 불자 이대로 있다가는 고사(枯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지만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집사람에게 잠시 머리나 식히고 오겠다면 집을 나섰다. 혼자서 괜찮겠냐며 말리는 가족들을 뒤로하고 차에 달랑 배낭 하나만 싣고 처음으로 혼자여행을 떠났다. 집을 나설 때는 기분이 야간 우울하여 어디로 가겠다는 뚜렷한 목적지도 없었다. 그냥 높은 산에 올라가서 넓은 바다를 보고 싶었다. 자동차는 어느새 서울을 벗어나 강원도 땅에 들어섰다. 좁은 땅덩어리에 한 시간 밖에 안됐는데도 너무나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았다. 사방이 산으로 막혀 약간은 답답했지만 울긋불긋 단풍으로 물던 차장 밖의 경치를 감상하며 새로 공사한 서울-춘천 고속도로를 타고 홍천까지 갔다. 홍천서부터는 국도를 이용하여 시원하게 뚫린 미시령터널을 지나니 설악산의 울산바위가 마치 커다란 병풍처럼 다가왔다. 혼자 여행이 다소 지루하고 외롭기는 했지만 머리가 좀 맑아져오는 느낌이었다. 설악산으로 향하는 길은 늦은 단풍객들로 길이 꽉 막혔고 산을 오르기는 너무 늦은 시간이라 우선 바다가 보고 싶었다.

  우리나라 최북단인 고성에 있는 화진포해수욕장으로 갔다. 한없이 넓은 바다가 나를 반기고 있었다. 드라마 ‘가을동화’에서 준서(송승헌)가 죽음을 앞둔 은서(송혜교)를 업고 걷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났다. 울창한 송림으로 뒤덮인 철지난 해수욕장은 마치 오일장이 끝난 장터처럼 썰렁했고 고즈넉한 나머지 쓸쓸하기까지 했다. 짙푸른 바다는 눈이 시리게 바라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마치 인생의 뒤안길에서 깊은 시름에 빠진 나의 마음을 동정이라도 하듯이 파도는 철썩철썩 나의 답답한 마음을 잘도 쓸고 간다. 에메랄드 빛 바다와 울창한 송림을 보니 마음이 저절로 맑아지고 새로운 희망이 솟는 것 같았다. 나는 경상도 산골에서 태어나 대학에 입학할 때 까지 바다를 본 적이 없었다. 여름방학 때 여행을 떠나 처음으로 포항에서 거대한 동해바다를 보고 얼마나 감격했는지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또렷하다.

  화진포는 해수욕장과 울창한 송림으로 연결된 석호(潟湖)인 화진 호수가 있는데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을까 할 정도로 자연풍광이 매혹적이었다. 해변의 모래 또한 명품이다. 하얀 모래가 밟으면 소리가 쟁쟁하여 마치 쇳소리와 같다'하여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이를 ‘우는 모래, 명사(鳴沙)’라 했고, 여기서 명사십리(明沙十里)란 말이 나왔다고 한다. 걸어보니 진짜 소리가 쟁쟁 울리는 것 같았다. 해변을 따라 남쪽으로 걸어가니 작은 야산을 등대고 소위‘김일성 별장’이 있다. 6.25전쟁 때 화진포 지역이 잠시 북한 땅에 속했을 때 김일성 주석이 가족과 함께 이곳에 며칠 묵었다고 한다. 그래서 김일성 별장으로 불리다가 지금은 역사안보전시관으로 재 단장돼 ‘화진포의 성’이라고 불린다. 

  화진포를 벗어나 해안 길로 접어드니 ‘거진’ 등대길이 있어 석양에 물든 바다를 보며 터벅터벅 걸었다. 코스는 짧지만 운치가 제법 있는 산책로였다. 이정표를 따라 왼쪽으로 접어들어 야트막한 고개를 넘어 조금 가니 오른쪽으로 ‘거진 등대공원’이 보인다. 갈림길마다 ‘관동별곡 800리 길’이란 팻말이 붙어 있어 길 잃을 염려도 없다. 등대 모퉁이를 돌아 나오자 거진항이 한눈에 들어왔다.  왼쪽은 바다, 오른쪽은 능선을 바라보는 멋진 길이다.

  거진항은 한때 전국의 명태어획량의 60% 이상을 출하했을 정도로 큰 포구였다. 거진항 입구에는 “명태와 아이”라는 풍어를 기원하는 돌 표지석이 있다. 여기도 사람 사는 것은 비슷해서 한때는 명태덕분에 거지가 없다는 이곳이 금강산관광이 중단된 후부터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어둠이 짙어지자 시장기가 돌아 나는 허름한 횟집에 들렀다.  거진항 활어센터의 횟집들은 주인들이 직접 잡은 자연산 활어를 아낙네들이 판다고 한다. 마음씨 좋게 생긴 횟집 주인의 권유에 못 이겨 회 한 접시를 시켰는데, 아주머니는 혼자 온 내가 이상한지 회를 치며 힐긋힐긋 쳐다본다. 손님이 없어서인지 횟집도 텅 비어 아주머니가 싱싱한 회 한 사라와 누군가 먹다 남은 소주반병을 얼른 내 온다. 바다는 어느새 어둠으로 변하고 멀리 고깃배위의 등불만 희미하다. 소주 한잔에 지나온 시간들을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한다. 우리 인생이 무한한 시간인줄 알았는데 종착역에 가까워 오니 내릴 준비를 해야만 하는 때가 온 것이다. 그냥 졸다가 남이 깨워줄 때 허겁지겁 내려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란 올 때는 준비 없이 오지만 갈 때는 그냥 갈 수가 없다. 뭔가 흔적을 남기기보다는 그동안 살면서 어지럽힌 것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다음세대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을 보태고 가야한다. 밤하늘의 찬 공기를 마시며 달빛 속에 밤바다를 걸으며 혼자서 흥얼대다가 조그만 여인숙에 몸을 뉘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정말 기분이 상쾌했다. 동해 바다에서 떠오른 해는 유난히도 붉고 크게 보였다. 이글거리는 태양을 보니 나도 모르게 불끈 힘이 솟았다. 가을 단풍을 보러 온 사람들로 만원인 설악산 보다는 나에게 바다가 더 어울릴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간단히 해장국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최북단인 대진항으로 향했다. 국도를 따라 시원한 바다냄새를 맡으며 달려가 항구입구에 다다르니 「통일의 길」이라는 표지석이 보였다. 이곳이 북쪽과 가깝다는 것을 실감케 한다. 먼 바다에 나가서 항구 쪽을 바라보면 게가 발을 오므린 형국으로, 해가 솟을 때는 마치 게가 거품을 물고 있는 모습이라 하여 대진이라 불리는 항구, 항구라기보다는 고만고만한 어민들이 모여서 아기자기하게 살아가는 수채화 같은 어촌이다. 대진 항을 지나 통일전망대에 올라 동해를 바라보니 북녘으로 뻗어난 해변과 길, 태고의 숨결을 간직한 하얀 백사장에 철조망이 데굴데굴 굴러가며 길을 막고 있다. 철책의 가시에 찔린 듯 가슴이 아려온다. 언젠가 북녘 땅도 밟으리라 다짐하며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오다보니 가진항이라는 조그만 항구가 보였다. 특별한 목적지가 없었기에 한 번도 가 본적이 없어 항구에 주차를 하고 방파제에 서서 바다를 바라본다. 비릿한 바다 냄새가 확 와 닫는다. 마을 앞 바닷가에는 푸르게 너울거리는 다시마와 옹기종기 정박해 있는 작은 어선들이 정겹다. 나도 저 바다처럼 항상 맑게 그리고 이곳에 사는 사람들처럼 소박하고 정겹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 속에 있는 욕심 이기심을 저 큰 바다에 비우고 또 비운다. 내가 아무리 버려도 바다는 모든 것을 받아주었다. 나는 바다가 정말 좋았다. 누가 바다처럼 나의 불만도 화도 욕심도 모두 받아줄까. 나도 바다가 되고 싶다. 떠나는 나를 아무 말 없이 바라만 보는 바다를 두고 차를 돌려 조금 내려오니 오른편에 작지만 아름다운 송지호가 있었다. 철새를 관찰하기위해 만들어 둔 전망대에 오르니 아직도 길 떠나지 못한 철새들이 여기저기서 날고 있다. 철새들이 때가 되면 떠나온 곳을 찾아가듯 우리도 언젠가는 온 곳으로 돌아가야 하리라. 동해안 7번 국도를 따라 다시 관동8경의 으뜸으로 꼽히는 청간정에 올랐다. 바다의 언덕에 조금은 쓸쓸히 덩그렇게 있어 올라보니 그야 말로 절경이다. 바다바람이 조금은 차가웠지만 가슴이 확 뚫리는 것처럼 후련했다. 다시 한 번 맑은 공기를 무료로 마음껏 들여 마시고 속으로 「바다야 고맙다」라고 여러 번 외쳤다. 주변의 단풍나무와 갈대가 잘 어울리는 영랑호를 한 바퀴 도니 산에 가지 않아도 가을 냄새가 물씬 풍겼다. 두 번째 저녁은 수산 항에서 묵고 싶었다. 몇 년 전 친한 친구 몇 명이 동부인하여 그곳에서 하루를 묵은 적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여니 커다란 해가 방안 가득히 떠올랐던 그 일출을 다시 보고 싶었다. 호수를 벗어나 남쪽으로 가니 좌우에 산과 바다가 나란히 한 폭의 그림처럼 절경이다. 이 길들이 ‘관동별곡 800리 길’로 송강 정철이 유람 다니며 관동별곡을 지은 해안 길이 아닌가. 수산항을 가는 길은 예전과 달리 많이 변해있었다. 이미 옛날의 수산항이 아니었다. 몇몇 되지 않던 외딴 조그만 어촌이 이제는 설악산 가을 단풍객들로 대형식당들도 만원을 이루고 주차장에는 평일인데도 대형버스까지 보였다. 이층에 민박이라고 쓰인 구석진 조그만 식당에 자리를 하고 저녁을 주문했다. 소박하지만 정성스레 밥상을 내미는 분은 허리가 구부정하고 나이가 많으신 백발의 할머니였다. 이제는 대형횟집에 밀려 장사가 옛날보다도 더 못하다고 한다. 그래도 할머니는 동네가 사람들로 북적이고 길이 잘 뚫려서 사는 맛이 난다고 했다. 저녁을 먹고 바다 바람을 쐬기 위해 밖으로 나오니 하늘에는 그야 말로 별이 총총하였다. 멀리 밤바다에는 오징어 배가 불을 훤하게 밝히고 작업에 여념이 없다. 낮과 밤을 거꾸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오징어 배를 보니 내일 아침에는 속초의 어시장을 가보고 싶다. 할머니는 어시장을 제대로 보려면 새벽 서너 시에는 나가야 한다고 하기에  피곤한 몸을 억지로 눕혔다.

   아직도 밖은 어두운데 새벽 어시장의 경매모습을 보고 싶어 눈꺼풀이 한 짐인 피곤한 몸을 깨워 속초 북항인 동명항으로 갔다. 가로등 불빛을 따라 달리니 금방 항구에 도착했다. 어시장은 벌써 발 디딜 틈도 없이 만원으로 사람 반, 고기 반이다. 여기저기서 흥정하며 외치는 소리와 손짓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지만 고기는 주인을 찾아서 바쁘게  팔려나갔다. 남들이 곤히 잠든 새벽에 매일 이렇게 어시장에서는 벌떡이는 물고기처럼 생생한 거래가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동안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는 것이 불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부끄러웠다. 무엇을 하던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한 시간씩 3년만 하면 못 할 것이 없겠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뜨거운 생선국으로 아침을 먹고 바윗돌 위에 있는 정자 영금정에 올라 속초항의 아름다운 경치와 동해 바다를 보고 나를 찾게 해준 동해바다에 거듭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바다를 뒤로하고 서울로 향하는 길은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진 듯 맑고 가벼웠다. 그리고 내년에는 새로워진 모습으로 가족까지 같이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아직 지키지 못한 약속을 위해 조만간 가을이 다가기 전에 고해성사를 하는 심정으로 동해바다를 다시 만나고 싶다.


[상기 작품은 2010년 국토해양부 해안권 발전기획단의 제4회 겨울 해안이야기 최우수상을  수상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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