松珉隨筆房

궁상떨기 좋은 날

혜안1952 2010. 12. 30. 21:55

  궁상떨기 좋은 날


  오늘은 새해 첫 출근일이다. 아침부터 일기예보가 제법 맞다. 창문을 내다보니 자동차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눈이 많이 왔다. 눈 폭탄이 터졌다. 지금도 눈이 펑펑 내리고 있다. 얼마 전부터 배우기 시작한 사진실습을 할 절호의 기회가 왔다. 11층 우리 집에서 아래를 보니 자꾸 카메라에 손길이 간다. 작은 애가 출근길에 차를 가지고 간다고 하여 겨우 달래서 보냈다. 이런 날은 대중교통이 좀 복잡하지만 최고로 안전하고 좋은데 아직 철이 없어 자꾸 편한 것만 찾는다. 나도 서둘러 출근을 한다. 근래에 보기 드문 설경이다. 가방대신 카메라를 둘러메고 나섰다. 밖에 나오니 집안에서 생각하던 것과는 눈이 더 많이 쌓였다. 신발이 푹푹 빠질 정도로 눈이 쌓이고 차도도 인도도 미처 치우지 못한 눈 때문에 미끄러워 버스도 엉금엉금 기며 겨우 다닌다. 괜히 카메라를 들고 왔다는 생각이 든다. 카메라보다는 신발을 등산화로 바꾸어 신고 왔어야 했다. 다시 집에 갔다 올 엄두도 나지 않는다. 사진이고 뭐고 다 포기하고 빨리 사무실에 갔다가 일찍 퇴근해야겠다는 생각뿐이다.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작은 아이에게 전화를 했다. 아직 지하철역이란다. 아침 7시에 나간 아이가 아직도 전철역에 있다니. 사연인즉 동료의 차로 회사 앞까지 갔는데 눈 때문에 길이 미끄러워 다시 집에까지 와서 승용차를 두고 지하철을 타려고 하는데 지하철마저 안온다고 한다. 벌써 10시다. 아이는 평소1시간도 안 되는 거리를 4시간도 넘어서 지각 출근을 하고 있다.

  눈은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그쳤다. 이렇게 눈이 많이 오기는 거의 100년 만에 처음이라고 한다. 폭설로 교통은 엉망이지만 온갖 지저분한 것이 눈 속에 묻히니 세상은 거야 말로 하얀 페인트로 도색을 한 것처럼 깨끗하고 고왔다. 마치 성당에서 고해성사후의 죄가 다 씻겨 나가서 기분이 날아 갈듯 한 마음이다.  집에 가서 등산화로 갈아 신고 다시 나올까 생각했지만 집에 가면 다시 나오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나는 버스를 타는 대신에 탄천을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신발이 눈 속에 푹푹 파묻히고 양발 속으로 들어온 눈 때문에 발이 시리다. 먼저 지나간 사람들이 겨우 한사람정도 지나갈 정도의 길을 발자국으로 만들어 놨다. 낭만을 즐기려는 중년부인들이 지나가면서 사진 찍는 나를 부러워하며 한마디 한다. 야, 저 사람은 사진 찍네. 멋있다. 나야 좋아서 하는 짓이지만 손도 시리고 신발에 눈이 들어와 양발마저 젖어 서글프기가 짝이 없다. 낭만과는 멀어도 한참 멀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궁상맞다. 사진을 얼마나 한다고 이 나이에 궁상을 떨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런 날에는 옛 애인이라도 만나 남한산성 창문 큰 찻집에 앉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카페라떼를 마시면 얼마나 낭만적일까. 아니면 소꿉친구라도 불러내 장떡에 막걸리를 마시며 동심으로 돌아가는 게 더 멋있을지 모른다. 내가 어릴 적에는 정말 눈이 많이 왔다. 내가 작아서 그런지 눈이 많이 와서 그런지 하여튼 쌓인 눈높이가 내 키만큼 될 때도 있었다. 그래서 등교 길에 눈에 누워서 사람자국을 새기기도 했다. 처마에 달린 고드름을 가지고 장난도 많이 쳤다. 

  열심히 사진을 찍다보니 내가 꽤 대단한 작업을 하는 것처럼 착각이 들기도 했다. 셔터 누르기에 바빠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는데 벌써 가로등불빛이 하나둘씩 들어온다. 집에 도착하니 집사람과 아이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어디 갔다 늦게 오느냐고 난리다. 내 행세를 보고는 굿은 날씨에 무슨 청승을 그렇게 뜨냐고 핀잔을 준다. 저녁을 먹고 조금 전에 찍은 사진을 보니 그 광경이 눈에 선하다. 탄천 개울가 돌 위로 소복소복 쌓인 눈이며, 수중보 위에 나란히 쌓인 눈, 갈대 위를 날아다니며 먹이를 찾는 참새 떼, 눈과 얼음으로 좁아진 개울에서 먹이를 찾는 오리 떼들, 그리고 가로등의 고드름, 눈사람을 만들며 즐거워하는 아이들 모습.  내친 김에 사진카페에도 올리고  지인들에게도 그리고 텍사스에 있는 아이에게도 100년만의 폭설이라고 제목을 크게 달아 이메일을 보냈다.

  방송에서는 폭설로 인한 피해이야기 뿐이다. 지난해에는 온난화로 지구 곳곳에서 홍수가 나고 더위로 많은 사상자를 내기도 해서 모두들 걱정을 했는데 이제 미니빙하기가 온다고 또 난리다. 기상대가 눈의 적설량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고 집중포화를 맞는다. 관청들은 새해연휴에 기습 폭설로 또 매를 맞는다. 세상의 이치가 다 그렇다. 한쪽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싫어하는 사람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아무리 눈이 좋다고 하지만 눈 때문에 피해를 입거나 욕을 먹으면 좋아하겠는가.  내가 눈 때문에 궁상을 좀 떨었나 보다.


20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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