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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하던 날

혜안1952 2011. 7. 14. 09:26

 

 
 
어디 사세요?라는 물음에 부암동이요라고 답하게 됐다 
 때마침 부암동에서 내가 살만한 방 한 칸을 발견한 것도 감사할 일이었다.
 
최근에서야 깨달은 건데 새로운 일을 도모할 때 나는 늘 책을 한 권 산다. 그 책이 무언의 스승이자 길라잡이가 돼 줄 것 같은 기대감을 품고 일정 시기 동안 가지고 다닌다. 이런 우연들이 겹쳐서 필연처럼 내가 지금 책들의 숲에서 일하게끔 인도한 것은 아닐까?
 
 
 
 
이사를 준비하면서 고른 책은 인테리어 디자인과 가구 디자인을 하는 양진석이 쓴 『이사하는 날』이다. 스타일리시한 한 젊은 남자가 9년간의 유럽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서울 평창동 576번지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그 집을 꾸미는 과정을 다룬 에세이다. 내가 사는 부암동에서 저자의 동네 평창동까지는 마을버스가 다닐 만큼 가까운 거리지만, 서로의 상황은 몹시 달라 보인다. 일례로 나는 요즘 가구계의 핫 트렌드인 스칸디나비아풍 가구를 눈 여겨 보는 정도인데 저자는 진짜 스칸디나비아 빈티지 책상과 의자를 사용한다. 오리지널을! 저자는 친구들을 불러 집들이를 하면서 손수 어여쁜 초대장을 만들었다. 나는 초대장이란 걸 인쇄하지 않고 손으로도 뚝딱 만들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한다. 살아가는 방식이 사람마다 참으로 다르다.
 
이 책이 눈에 밟혔던 이유는 저자가 이사에 대해 갖는 마음가짐이 좋아서였다.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여유를 부릴 수 있다면 이사를 기회 삼아 모든 게 빠르게 진행되어야 하는 요즘 사회에 소심한 저항을 해보는 게 어떨까? 자기 자신과 가장 가까운 공간인 집은 끊임없이 영감을 주는 곳이라고 말하는 저자의 자세가 멋지게 생각된다. 여태까지 내게 집이란, 지친 하루의 끝에 쉬러 가는 침대 있는 장소에 불과했다. 인테리어에 신경을 쓸 만큼의 공간적, 경제적 여유도 없었거니와 우리 가족의 이사 경력이 화려했기 때문에 집에 애정을 쏟아본 기억이 없다. 홍대앞의 방은 기가 막히게 좁아서 꾸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번 이사를 통해서 조금 어떻게 깔맞춤이라던가 가구 재질의 조화 등을 꾀해서 방 인테리어라는 걸 해볼까 싶어진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 스스로에 대해 알게 된 사실은 이런 것들에 흥미를 붙이면서 끈질기게 방을 꾸미기에는 내가 너무도 귀찮은 걸 싫어하는 족속이라는 것이다. 대체 부지런하게 방을 꾸밀 수 있는 사람의 DNA와 내 유전자는 뭐가 그리 다른 건지. 새로 들인 라텍스 침대의 편안함에 흠뻑 취한 나는, 침대 위에서 HDTV모니터의 리모콘을 만지작대는 즐거움을 포기하지 못한 채로 여전히 채 정리되지 않은 내 방을 3인칭 관점에서 바라본다. 이 상태로도 괜찮잖아, 텅 빈 CD장 옆 방바닥에 몇 백장의 CD들이 뒹굴고 있어서 정작 듣고 싶은 CD를 찾는 건 포기했지만 뭐 언젠가는 치우겠지, 에헤라디야.
 
사실 집보다도 부암동이라는 동네의 분위기, 정서에 나는 빠지고 말았다. 특히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내 방 창문 너머로 보이는 녹색 우거진 산의 늠름한 자태가 참 좋다. 삼림욕을 즐기면 몸에 좋은 피톤치드가 스트레스를 해소해 준다던데, 눈으로 마시는 맥주가 있는 것처럼 나는 매일 피톤치드를 눈으로 흡수하는 기분이다. 예전과 달리 눈이 번쩍 떠지는 정도까지는 아니라도 아침에 일어나는 일이 꽤 상쾌해 진 것 같다.
 
 
 
 
집에서 10분 정도 거리의 부암동 주민센터가 있는 언덕배기 풍경 또한 고즈넉하다. 보통 '부암동'이라고 할 때 사람들이 떠올리는 까페나 드라마 촬영장소 등으로 쓰인 여러 장소가 밀집해 있는 곳이다. 그러고 보니 근처 까페에서 인터뷰가 있어 처음 부암동 언덕배기에 갔을 때, 우연찮게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 올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서 이 동네에서 살면 참 좋겠구나하고 생각했지. 알고 보니 윤동주 시인의 언덕은 독일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철학자의 길(칸트, 헤겔, 괴테 등 웬만큼 유명한 철학자들이 실제로 다 걸어다녔다는)' 류가 아니라 윤동주 시인이 근처에 얼마간 머물렀으니 이 언덕에서 시상을 떠올리지 않았을까하는 일종의 추측과 바람을 담아 조성한 작은 공원 같은 곳이다. 그런 사실이 재미있기도 하고, 하늘공원의 미니어처 같은 기분도 들고 해서 아무튼 애정을 가지게 된 언덕이다.
 
회사를 오가는 풍경 또한 달라졌다. 부암동엔 지하철이 없다. 퇴근을 할 때면 회사 근처 경복궁역 근처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통의동, 효자동, 자하문 터널을 지나거나 혹은 통의동을 지나 경복고교, 청운중학교, 자하문 고개로 빠지는 약간만 다른 루트의 버스들을 탄다. 마치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설 때 갑자기 확 현실감이 느껴지는 것처럼, 광화문에서 경복궁역을 지나 버스를 타면 갑자기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 것만 같다. 낯선 대도시 번화가에서 작고 익숙한 동네로 타임머신을 타고 순간이동을 하는 것처럼 어리둥절해진다. 동네의 변화가 어제도 오늘도 회사원인 내게, 꽤 깊은 영향을 새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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